어둡고 으스스하다. 춘분 절기에 접어들었지만 냉기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습관적으로 뉴스에 눈길이 간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탄식과 울분에 찬 언어가 난무한다. 진영을 막론하고 희망 섞인 예측을 쏟아내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날 선 감정들이 부딪치며 내는 굉음에 귀가 먹먹하다.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려오는 날 선 언어에 저절로 낯이 찌푸려진다. 증오와 선동, 냉소와 저주의 언어를 들을 때마다 채찍에 맞은 듯 가슴이 아리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심연이 입을 벌려 우리를 삼키려 한다. 그 심연의 이름은 적대감과 분열이다. 아름다움, 사랑, 자유, 진리, 가족 등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들이 풀어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극복된 혼돈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혼돈은 공포감을 자아낸다. “역사의 호는 길지만 정의의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다”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을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다독여보지만 불안감은 쉬 스러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할 종교인들이 증오를 선동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가?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J 헤셸이 60여년 전에 쓴 글이 너무나 시의적절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울 때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다.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있도록 지키지 못한 종교 앞에서, 종교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난처한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성전과 구호들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입술에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마침내 표상이 되기를 그만두었다. 동(東)에는 어둠이 서(西)에는 가소로운 우쭐거림이 가득 차 있다. 이 밤을 어찌할 것인가? 이 밤을 어찌할 것인가?”
가소로운 우쭐거림이 넘치는 지금이야말로 밤이다. ‘이 밤을 어찌할 것인가?’ 이런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종교학자인 정진홍 교수는 ‘자기 신념의 순수성에 빠질수록 맹신에 빠진다’고 말한다. 자기 정화와 성찰의 힘이 없다면 맹신은 광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광신은 위험하다. 증오의 숙주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증오는 나와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제거함으로 분열을 치유하려 한다. 그래서 폭력적이다. 사랑은 타자의 고통을 자기 속으로 받아들임으로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증오는 강력하고 사랑은 연약하다. 증오의 말은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만 사랑의 말은 무시되기 일쑤이다. 성찰과 숙고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광장 정치는 위험하다.
늦어질 수는 있지만 봄은 오게 마련이다. 꽃샘추위가 있다 해도 식물들은 꽃을 피워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없다면 역사는 여전히 겨울이다. 좋은 세상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 깃든 불신과 증오의 안개를 걷어내고, 광장을 뒤덮고 있는 적대감의 쓰레기를 치우고, 폭력과 폭언을 그쳐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든 기각하든 당분간 혼란은 불가피하다.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만들어가려는 검질긴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심는 사람이 있고 거두는 사람이 있다. 오늘 우리가 심는 씨앗을 뒤에 오는 세대가 열매로 거둘 것이다. 바람을 심어 태풍을 거두게 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주의가 심화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외롭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 정치적 과격주의이다. 부드러움이 생명의 친구라면 굳어짐은 죽음의 친구이다.
성직자를 나타내는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x)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두 진영 사이에 다리를 놓아 오갈 수 있게 하는 것, 장벽을 철폐해 소통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인의 직무인 동시에 좋은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의 소명이다. 저만치 역사의 봄이 주춤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봇도랑에 물이 차면 생명도 깨어날 것이다. 이 희망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