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군? 용군? 폭군? …‘대통령 윤석열’은 역사에 어떤 지도자로 기록될까

2024-12-16

어떤 이가 혼군(昏君·혹은 암군·暗君)이고, 또 어떤 이가 용군(庸君), 또 어떤 이가 폭군(暴君)인가.

잘못된 정치로 악명을 떨친 군주에 관한 평가도 구분된다. 율곡 이이(1536~1584)가 1569년(선조 2) 독서휴가(사가독서·賜暇讀書) 도중 임금(선조)에게 지어 올린 글(‘동호문답’)에서 명확하게 밝혔다.

‘동호독서당’(서울 옥수동)에서 왕도 정치의 경륜을 문답체로 서술해 올렸다고 해서 붙인 글제목이다.

■폭군, 혼군, 용군

‘동호문답’에서 이이는 ‘잘하는 정치’와 ‘문란한 정리’를 각 두가지로 구분했다.

“임금의 재지(才智·재주와 지혜)가 출중…하거나, 재지는 부족해도 어진 이에게 정사를 맡기면 잘하는 정치다. 그러나 신하를 믿지 않거나, 간신의 말을 믿어 귀와 눈이 가려지면 문란한 정치다.”

이이는 문란한 정치를 편 군주를 세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백성의 힘을 빼앗고…충언(忠言)을 물리치고…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는 폭군(暴君)이다. 선정의 뜻은 있지만 간신을 분별하지 못하고…관리들은 재주가 없어서 패망하게 되는 자는 혼군(昏君)이다. 나약하고 과단성이 없어…정사가 떨치지 못하여 구태만 되풀이하면서 날로 쇠약해지는 자는 용군(庸君)이다.”

■주지육림과 포락지형

중국 역사에서는 폭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군주가 3명 있다. 여인(말희·달기)에게 잘 보이려고 폭정을 휘두른 하나라 걸왕(기원전 1652?~1600?)과 상나라 주왕(기원전 1075~1046), 백성의 언로를 막은 주나라 여왕(기원전 877~842) 등이다.

걸왕은 부인(말희)을 위해 으리으리한 궁전을 건조하여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고, 궁전 뒤뜰에 술을 채운 연못(주지·酒池)을 만들어 배를 띄워 남녀가 즐겼다.(<회남자> ‘본경훈’·<신서> ‘자사’ 등) 주지육림의 효시다. 국고가 탕진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상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왕도 오십보백보다. 애첩 달기의 비위를 맞추려고 주지육림을 만들어 벌거벗은 남녀를 뛰어놀게 한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주왕과 달기는 기름을 바른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어놓고 죄인을 걷게 하고는 떨어져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깔깔댔다.

주왕이 자행한 이 형벌을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 한다. 주왕은 신하이자 서형(庶兄)인 비간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자, 끔직한 일을 저지른다. “성인의 심장엔 구멍이 일곱개가 뚫렸다는데 한번 보자”면서 심장을 해부하는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또 주왕은 제후들을 죽여 포(脯)를 떠서 소금에 절인 뒤 다른 제후에게 보내 맛을 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사기> ‘은본기’)

■백성의 입을 틀어막으면…

주나라 여왕(厲王)은 어떤가. 간신(영이공)을 중용하자 백성들이 여왕을 비방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 무당을 불러 비방하는 자를 감시했다. 여왕은 무당의 고발 명단에 오른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렇게 공포정치를 펼치자 언로가 막힌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교환했다. 여왕이 기뻐하며 재상 소공에게 자랑했다. “내가 비방을 없앴소. 이제 아무도 날 비방하지 않소.”

이 말을 들은 소공은 기가 막히다는 듯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억지로 말을 막다뇨.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막아놓은 둑이 터지면 피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공은 “백성은 속으로 생각한 후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라면서 “그들의 입을 막는다면 찬동하는 자가 몇이겠냐”고 비판했다.

소공은 “수로를 열어 물이 흐르게 하는 것처럼 백성들의 언로도 활짝 뚫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소공은 백성의 여론이란 ‘즉흥’이 아니라 ‘심사숙고 후에 발현되는 것’으로 분석했다.

또 그런 여론을 막는 것은 둑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렇게 쌓은 둑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경고했다. 이미 2800년 전에…. 그러나 폭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841년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國人暴動), 여왕은 도주했다. 이때 소공과 주공 등 두 재상이 14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사기> ‘주본기’) 이것이 공화정의 시초다.

■여인을 웃게 하려고…

혼군(암군)도 보인다. 주나라 유왕이 대표적이다. 유왕은 포나라에서 바친 미녀(포사)를 총애했다. 포사는 잘 웃지 않는 여인이었다.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썼다.

어느 날 유왕이 봉화를 올리고 큰 북을 치자 제후들이 ‘변란이 일어난 줄 알고’ 허겁지겁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하지만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포사가 “이게 뭐냐”고 투덜거리면서 돌아가는 제후들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드디어 포사가 웃었어!” 크게 기뻐한 유왕은 이후 오로지 포사를 웃게 하려고 봉화를 올리고, 큰 북을 여러차례 쳤다. 처음에는 달려오던 제후들은 ‘양치기 왕’의 봉화 놀이를 믿지 않았다. 그 사이 유왕은 포사의 말만 듣고 바른 소리를 하는 신하들을 벌주었다. 그러자 관리들이 포사의 말만 듣고 아부했다.

어느 날 주나라에서 내부 반란세력과 결탁한 오랑캐(견융) 군대가 쳐들어왔다. 유왕이 봉화를 올렸지만 어떤 제후도 오지 않았다. 유왕은 죽임을 당했고(기원전 771), 그의 뒤를 이은 평왕(기원전 770~720)은 기원전 770년 낙읍(낙양)으로 천도했다.(<사기> ‘주본기’·<열녀전> ‘얼폐전’ 등)

주나라는 서주→동주시대로 바뀌었다.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퇴해짐에 따라 춘추전국 시대가 개막한 시기이기도 했다.

■밥 없으면 고기죽

진(秦) 2세 호해(기원전 210~207) 역시 혼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환관 조고(기원전 258~207)에게 국정을 맡긴 것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했다. 아방궁 공사를 만류하는 대신들에게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황제가 됐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일축했다.

<사기>의 편찬자인 사마천은 이를 두고 ‘인두축명(人頭畜鳴),’ 즉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고 혀를 찼다.(<사기> ‘진시황본기’)

진(晋) 혜제(290~307)도 도긴개긴이었다.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죽자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거냐(何不食肉糜)”(<진서> ‘혜제기’)고 고개를 갸웃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용군’의 대명사도 있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영제(168~189)가 거기에 속할 것이다.

당시 ‘10여 명의 환관’(십상시)이 국정을 농락하고 있던 시대였다. 십상시는 진나라 환관 조고처럼 12살에 등극한 황제를 주색에 빠뜨리면서 마음껏 국정을 주물렀다. 그런데 당시 ‘십상시’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영제는 유력한 환관이던 장양(?~198)과 조충(?~198)을 ‘나의 아버지 장상시, 나의 어머니 조상시’라 추켜세웠다.(<후한서>)

■연산군의 롤모델

한국 역사에서는 어떨까.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조선의 연산군(1494~1506)을 살펴보자.

연산군은 간신인 유자광(1439~1512)과 임사홍(1445~1506)을 믿어 난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연산군은 1506년(연산군 12) 8월14일 “이제부터 사관은 시정(時政)만 기록할 뿐 임금의 일은 기록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진2세 호해를 소환했다.

“‘진 2세는 (황제란) 눈과 귀가 좋아하는 바를 하고 마음과 뜻이 즐거운 것을 다한다’고 했다. 모두들 잘못된 말이라고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단 말인가.”

진 2세 호해가 누구인가. 아방궁 건축 등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군주가 멋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잔말이 많냐’고 일축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그런 호해를 롤모델로 삼은 것이다. 하기야 갑자사화(1504)를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연산군이 아닌가.

그렇다면 연산군은 ‘임금 마음대로 살겠다’고 했고, 간신 유자광과 임사홍을 믿고 난행을 저질렀으니 ‘혼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았다’는 점에서는 ‘폭군’이라고 해도 된다.

이이의 분류법에 따르면 혼군(암군)과 용군은 지도자의 무능에 강조점을 둔다면, 폭군은 독선과 불통에 따른 폭정의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물론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점에서는 셋다 오십보백보다.

■군주는 배, 백성은 물

하지만 혼군(암군)이든 용군이든 폭군이든 잘못된 정치는 곧 백성의 저항을 부른다.

‘백성을 물로, 임금을 배’로 비유한 순자(기원전 298?~238?)의 ‘혁명론’이 심금을 울린다.

“군주는 배(舟)이고, 백성을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고사를 감히 연산군에게 인용한 ‘간 큰’ 신료들이 있었다.

한치형(1434~1502)·성준(1436~1504)·이극균(1437~1504) 등 3정승이다. 3정승은 연산군에게 시폐 10조목을 올렸다.(1502년 3월25일) 말하자면 임금의 잘못된 정치, 즉 ‘실정(失政)’ 10가지를 뽑아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이들은 이때 ‘감히’ 순자의 혁명론을 인용한다.

“임금이 가볍고 백성이 중합니다. 옛사람(순자)이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舟)라고 한 것은 물이 배를 뜨게 할 수도, 뒤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두려운 것은 백성(可畏非民)’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이반하면 나라가 임금의 나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무오사화(1498)의 쓴맛을 본 때였다. 그럼에도 3정승은 목숨을 걸고 ‘임금 당신이 잘못하면 백성이 당신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간했던 것이다. 그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해(1502) 죽은 한치형은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관을 쪼개 시체를 자름)됐다. 성준과 이극균 역시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이중 이극균은 시신을 다시 파내어 해골을 분쇄한 뒤 그 형적을 없애게 하는 이른바 ‘쇄골표풍(碎骨飄風)’의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임금이 부도하면 쫓겨날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친 3정승의 기개가 존경스럽다.

■서라벌에 붙은 대자보

통일신라 진성여왕(887~897)은 혼군(암군)의 이미지가 강하다. 888년(진성여왕 2) 서라벌 시내에 수수께끼 같은 벽보가 붙었다.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바하(鳧伊娑婆訶)”(<삼국유사> ‘기이편·진성여왕 거타지조’)

<삼국유사>에 대자보의 해석문이 나온다.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관작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우삼아간은 진성여왕의 측근에 있는 3~4명의 총신이고, 부이는 부호를 가리킨다.”(<삼국유사>)

‘나무(南無)’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에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나무망국’은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표한 것이다. 맨 마지막의 ‘사바하(娑婆訶)’는 앞의 주문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불교용어이다.

‘소판’은 누구인가. 진성여왕의 숙부이자 정부(혹은 남편)인 위홍(?~888)의 관작(신라 17관등 중 세번째)이다. ‘부이’는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를 가리킨다. 정리해보자.

당대 신라는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 부인과 애인 위홍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벽보의 내용은 ‘신라여! 여왕이여! 위홍과 부호 같은 3~4명 때문에 망할 것이다!’라는 저주문이다. 측근의 국정농단이 신라 1000년 사직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자진사퇴한 진성여왕

진성여왕은 대자보 사건 이후 당나라 유학파 최치원(857~?)이 건의한 시무 10조를 받아들이는 등 안간힘을 쓴다. 최치원은 아찬(6등급)에 기용된다. 그러나 진성여왕의 몸부림은 끝내 수포로 돌아간다. 아마도 기득권층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최치원은 곧 외직(태수)으로 밀려났다.

국정능력을 상실한 진성여왕은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재위 11년 만인 897년 오빠(헌강왕)의 서자인 요(효공왕)에게 흔쾌히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자진사퇴였다. 진성여왕은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난 것은 나의 부덕한 탓”(896년 9월)이라고 사퇴의 변을 설명했다.

진성여왕은 역사적으로 ‘음란한 여왕’이자 측근 정치의 전형으로 혹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왕은 신라 역사상 재위 중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최초의 임금임을 아는 이는 적다. 새삼 여왕에 선언한 무조건 사퇴의 변이 떠오른다. “모두 내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양위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맹자(기원전 372?~289?)의 무시무시한 역성혁명론이 떠오른다.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에 불과하므로 (신하가) 죽여도 좋다”(<맹자> ‘양혜왕 하’)

그렇다면 한밤중에 게엄을 선포하면서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윤석열씨는 어떤 지도자로 역사에 남을까. 혼군인가, 용군인가, 폭군인가. 아니면 ‘혼군+용군+폭군’을 겸비한 최악의 지도자로 기록될 것인다. 새삼 덕수군 중명전에 재현되어 있는 1905년 11월18일 새벽 을사늑약 체결장면이 떠오른다.

그곳엔 그 자리에 참석한 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 등 을사오적은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인물들이 밀랍인형이 앉아있다. 새삼 역사의 엄정한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경향신문·한겨레는 2024년 12월9일자에 ‘윤석열 탄핵 투포에 불참한 국민의 힘 국회의원 105명’의 명단을 실었다. 사진과 함께… .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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