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여 공화국 해부 〈하〉
한국에선 비급여 진료가 사실상 정부 관리 밖의 시장이다. 실손보험이 날개를 달아준 덕분에 2015~2022년 연평균 7.6% 증가해 왔다. 비급여 증가 원인의 56%가 실손보험이다. 비급여 문제점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3일자 1,8면〉가 나가자 한 독자는 "우리 가족은 월 실손 보험료로 30만원이 나가는데, 20년간 병원에 간 적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중앙일보는 9, 10월 독일·일본·대만의 비급여 관리 제도를 취재했다. 공통점은 '한국 같이 손 놓고 있는 나라는 없다'이다. 대만 타이베이시 공무원은 "비급여 심사가 없다는 게 놀랍다"고 말할 정도다.
지난달 3일 독일의 옛 수도 본. 13년째 정형외과 의원을 운영 중인 재독 한인 의사 문병진씨는 "독일에서는 비급여 진료 가격이 매우 엄격하게 관리된다"며 "귀찮을 정도로 가격이 제한되지만, 환자에게 비급여 진료를 더 신중히 제공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의학적으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에만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 의료적 필요를 넘어선 서비스는 환자 요청에 따라 제공된 경우에만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
비급여 진료 가격을 책정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수가 규칙 제1조다. ‘GOÄ(Gebührenordnung für Ärzte, 의사 진료비 규정)’로 불린다. 독일 연방의사협회가 마련한 수가표를 기반으로 1965년 도입됐다. 진료의 난이도 등 객관적 근거에 따라 책정하는 가격이 세세히 제시돼있다.
한국식 비급여가 독일의 ‘IGeL(Individuelle Gesundheitsleistungen)’이다. 의사는 환자와 자율적인 계약으로 IGeL을 제공할 수 있지만, 진료비는 GOÄ에 따라야 한다. GOÄ의 기준값에 난이도·시간 등의 가중치(통상 1~2.3배, 최대 7배)를 적용하는데, 2.3배 넘으면 보험사에 사유를 제출해야 한다. 의사가 의료 행위의 효과·부작용·가격을 환자에게 직접 설명하고 서명을 받아야 한다.
공보험 급여 보장 범위를 결정하는 연방보건부 산하 연방공동위원회(G-BA)의 앤 마리니 대변인은 "독일에서도 개인 병원 접수창구에서 IGeL(비급여)을 권유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며 "IGeL을 금지할 수는 없다. 환자가 '이 의사가 (비급여를) 팔아먹으려는 장사꾼은 아닌지' 등을 숙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은 ‘IGeL 모니터’로 5년마다 비급여를 평가해 환자들에게 알린다. 빈도가 많은 비급여 항목의 의학적 효과, 부작용 등을 전문가가 평가해 5단계 등급을 매겨 공개한다. 현재 등급이 공개된 게 55개인데, '긍정' 등급은 전무하다. 가령 '암 조기 발견을 위한 난소 초음파 검사'에 대해 '부정' 등급을 매기고, '정확도 낮음'이나 '위(가짜) 양성 소견 많음' 등의 근거를 제시한다.
IGeL 모니터를 운영하는 연방 의료자문서비스의 리나 치트카 박사는 "'긍정' 등급을 받을 정도로 유익한 의료행위라면 건강보험 보장 항목에 포함되기 때문에 IGeL로 남아있는 항목 중에는 긍정 평가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 9월 2일 일본 도쿄의 니시신주쿠 전철역. 곳곳엔 미용·피부 클리닉 광고판이 붙어있다. 전철 객차 안에도 비슷하다. 고베에서 만난 미용성형외과 개원의인 스기모토 이사오(59)는 "한국이 미용·성형 분야 1등이다 보니 한국 병·의원에서 하는 광고 그대로 일본이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미용·성형 분야는 한·일이 비슷하다.
일본은 건강보험 보장률(84.9%, 2021년)이 높은 대신, 건보 급여·비급여 진료를 병행하는 혼합진료를 엄격히 금지한다. 안전성·유효성이 확인되지 않은 의료를 막고, 환자 부담을 줄이려는 취지다. 항암제 등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풀어준다. 혼합진료하면 건보가 적용되지 않고, 환자가 다 부담한다. 개원의 스기모토는 "비급여 진료 후 부작용이 생겨서 2차 치료가 필요해도 절대 건보에서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국건강보험협회의 카와마타 타케오 이사는 "일본 국민은 건보에서 필요한 의료를 다 보장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비급여 진료는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여겨 대개 부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신경내과 의사인 신용문 이사장도 "일본에선 비급여 진료를 하는 의사가 많지 않고, 이를 위주로 하는 의료기관은 별로 좋지 않은 곳이란 이미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대만은 총액계약제를 통해 이듬해 의료계에 지불할 총액을 정하고 의료계가 이를 나눈다. 의료비 증가를 통제한다. 보험료율이 높지 않아 건보 보장률이 70%(병원별로 25~40%) 정도로 낮은 편이다. 나머지는 비급여 영역이다.
신약이나 신기술은 위생복리부(우리의 보건복지부·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어 중앙건강보험서(건보공단)에서 급여·비급여를 결정한다. 여기까지 한국과 유사하다. 비급여는 매우 엄격하게 관리한다. 1인 병실료, 로봇 수술 등의 신의료 기술, 고가의 신약이나 약, 접수 비용 등이 대표적이며 항목이 그리 많지 않다.
지난 9월 12일 오후 타이베이시중의사공회 사무실. 타이베이시 위생국 황팅유 팀장 등 10여명이 중앙일보 취재진에게 비급여 제도를 설명했다. 황 팀장은 "병원이 원가분석·가격 등의 자료를 내면 위생국이 전문가위원회(소비자 대표 포함) 의견을 구해 허가하고 가격을 정한다. 소비자 부담 능력과 원가를 고려해 합리적으로 가격을 정한다"고 말했다. 총액제 점수(건보 수가)의 배가 안 되면 허가받지 않아도 된다. 황 팀장은 "한국에 비급여 항목 심사가 없다는 게 놀랍다"며 "한국의 건보 등재 절차가 어떻게 돼 있나"라고 되물었다.
심서빈 타이베이시중의사공회 부이사장은 "1,2,3차 의료기관 종류와 관계없이 비급여 치료를 하려면 반드시 위생국 심사를 거쳐야 한다. 한국과 달리 대만은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의사 통제가 강하다. 한국은 이런 다방면의 압박이 없는 것 같아서 부럽다"고 말했다. 양한추안 대만의원협회(우리의 병원협회·의사협회를 합한 조직) 명예이사장은 "대만 환자는 비급여 항목을 반대하지 않는다. 환자의 부담이 낮고 건보료가 싸서 만족도가 90% 이상으로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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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베를린ㆍ본(독일)=남수현 기자, 도쿄ㆍ고베(일본)=정종훈 기자, 타이베이(대만)=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