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凍土)의 땅, 알래스카 인근의 차갑고 거친 바다, 그리고 역대 최악의 선박 기름유출 사고로 꼽히는 ‘엑손 발데스호’ 트라우마….
트럼프의 호언장담에도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사업이 쉽지 않을 것으로 에너지 업계가 전망하는 이유다. 자칫하면 우여곡절 끝에 표류하는 동해 가스전처럼 알래스카판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의지에 따라 사업 진행이 급물살을 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 연설에서 “알래스카에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인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있다”며 “일본, 한국과 다른 나라가 수조 달러씩 투자하며 우리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한국가스공사와 SK이노베이션, GS에너지 등 에너지 업계,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등 조선업계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하지만 사업의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난제가 복합적으로 얽혔다는 점에서 정부만 바라보는 모양새다. 알래스카 북부에서 대규모 석유·천연가스 유전을 발견한 건 1960년대지만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개발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먼저 알래스카 산유지가 북부 노스슬로프 일대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LNG를 주요 소비처와 가까운 남부까지 보내려면 1300㎞ 길이 가스관을 놓아야 한다. 이 길은 1년 내내 땅이 얼어있는 영구 동토층이다. 여름철 배수가 잘되지 않아 호수인 곳도 많다. 기초 공사부터 어렵다는 얘기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에서 LNG 개발사업 등을 경험한 권효재 한양 상무는 “가스관은 99.9% 짓더라도 0.1%가 이어지지 않으면 실패하는 사업”이라며 “가스관을 잇더라도 극한 추위와 강풍으로 유지·보수하기 어려운 극한의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가스관을 짓더라도 LNG선이 오가는 바닷길이 악조건이다. 경제성만 따지면 노스슬로프에서 (남쪽으로 가스관을 이을 필요 없이) 베링 해를 거쳐 LNG를 운반하면 된다. 하지만 베링 해는 여름철 3개월 가량만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다. 그나마 알래스카 남부 인근 해안도 북극 유빙(流氷)이 떠다니는 경우가 많다. 풍랑도 심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친 바다다. LNG선에 쇄빙 기능까지 갖춰야 한다.
우종훈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기술이 많이 나아져 쇄빙 LNG선 개발도 가능하다”라면서도 “건조 비용이 늘어나는 데다, 유빙이 있을 경우 배가 느려져 수익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엑손 트라우마’도 걸림돌이다. 공교롭게도 1989년 ‘엑손 발데스호 기름유출 사고’가 알래스카 남부 해안에서 일어났다. 3만8800t의 기름이 유출됐고, 2000㎞에 달하는 해역에 오염 피해를 일으켰다. 당시 사고로 노스슬로프 지역의 추가 유전 개발 프로젝트가 사실상 중단될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밀어붙이면 사업은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6일 "어렵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이 한·미협의체를 구성해 신중하게 따져보겠다"고 말했다. 엑손모빌 등 글로벌 정유사가 과거 프로젝트에서 철수한 사례에 대해서는 “과거보다 기술이 발전했다. 트럼프 정부 측에서 의지가 있는 만큼 규제 등을 빠르게 해소하리란 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섣불리 긍·부정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트럼프가 관심을 보인 만큼 참여 여부를 관세 같은 다른 협상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 이 관계자는 “정부는 관세, 비관세, 알래스카 LNG 개발, 조선, 에너지 다섯 가지를 종합적으로 보며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종훈 교수는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면 국내 업계도 일단은 참여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잠재성은 있지만, 워낙 장기·대규모 프로젝트인 만큼 정부 주도로 시추부터, 플랜트, 가스관, LNG선 등 어느 분야에 얼마까지 참여할지 다각도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