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고통, 굶주림, 폭격,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았다. 다른 어떤 나라의 낙원보다 가자지구의 지옥이 더 낫다.”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 사는 아마드 사피는 5일(현지시간) CNN에 이같이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이라 부르며 강제 이주 대상으로 지목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곳을 ‘지옥’이 아닌 ‘낙원’으로 바꾸겠다는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 미 대통령의 구상에 분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가자지구를 미국이 장악하고 중동의 리비에라(휴양지)로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가자지구 주민도 모두 그곳을 떠나고 싶어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사자인 가자지구 주민들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가자지구 주민 파티 아부 알사이드(72)는 “트럼프는 마치 땅을 나눠주는 왕처럼 말한다. 이건 미친놈(madman)의 말이다. 팔레스타인인을 아는 이라면 우리에게 조국을 떠나는 것이 죽음과 같다는 것을 안다”며 “가자지구는 부동산 프로젝트가 아니고 우리의 땅”이라고 알자지라에 밝혔다.
그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에 가자지구 알마와시 해안가로 피란을 갔다가 휴전 이후 폐허가 된 칸유니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 쓸모없는 잔해더미가 보이나. 여기 있는 벽돌 하나하나가 미국이 줄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손자 모하마드(10)도 “미친 건가 멍청한 건가? 우리가 왜 떠나야 하느냐. 가자는 팔레스타인의 일부”라고 말했다.
이들이 이처럼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이 ‘제2의 나크바’(대재앙)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1948년 국가 수립을 선포한 이후 팔레스타인인 약 75만명이 고향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이 사건이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남긴 상처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대재앙’이란 이름이 붙었다.
지난해 이스라엘군의 폭격이 집중된 가자지구 북부를 떠났던 아우니 알와디아는 1948년에 대한 ‘집단 기억’이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는 이유라고 했다. 그는 “1967년에도 팔레스타인인을 이주시키면서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일시적일 뿐이라고 했으나, 그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CNN에 말했다.
자발리야 난민촌에 사는 아부 엘라이시도 “조상의 비극이 반복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AP통신에 밝혔다. 요르단강 서안지구 라말라에 사는 모하메드 알아미리는 “트럼프가 가자지구 주민을 이주시키고자 한다면, 1948년에 그들이 쫓겨났던 원래 고향, 이스라엘 내부의 황폐해진 마을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16개월간 이어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를 “지옥”이라고 표현하며 주민들의 강제 이주를 인도주의적 명분으로 포장했으나, 그 자체로 ‘인종 청소’에 해당하는 전쟁 범죄라는 비판이 나온다. 가자지구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그 자체로 기자회견 옆자리에 선 네타냐후 총리의 전쟁 범죄를 인정한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1949년 제네바 협약, 1998년 로마협약 등 전쟁범죄를 규정한 두 국제법은 임의적이고 영구적인 강제 이주를 범죄로 간주한다. 필요성이 인정되는 이주의 경우도 제한적이다. 사라 싱어 런던대 교수는 “군사적 필요성이나 생명 보호를 위해 긴요한 경우에만 일시적으로 이주시킬 수 있긴 하지만 점령지 외부로 보내선 안되고 최단 시간에 그쳐야 한다”고 가디언에 밝혔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지난달 19일 1단계 휴전에 돌입한 후 가자지구에선 피란민 약 50만명이 원래 살던 곳으로 귀환했다. 42일간의 1단계는 휴전은 다음 달 초 만료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 장악’ 구상을 밝히며 휴전 2단계 논의가 불투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