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나크바 시작되나···‘가자 인종청소’ 노골화한 트럼프 폭탄 선언

2025-02-05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가자지구에서 220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주변국으로 영구 이주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 땅을 접수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폭탄 선언’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중동 분쟁을 해결해 노벨평화상을 받겠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미국 대통령이 특정 민족을 대대로 살아온 터전에서 계획적으로 제거하는 ‘인종 청소’를 사실상 선언했다는 점에서 파문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는 미국이 가자지구를 ‘장악(take over)’하고 장기적으로 ‘소유(own)’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국제법상 불법 점령에 해당할 수 있는 데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중동 갈등에 뛰어들며 더 큰 분쟁을 열어 젖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이 이른바 ‘세계의 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을 거부하고 불개입주의 노선을 표방해왔다는 점에서 가자지구를 미국이 장악하겠다는 4일(현지시간) 그의 발언은 폭탄 선언에 가까웠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정부에선 중동 갈등에서 손을 떼겠다는 입장을 취해왔는데 이번엔 정반대의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라며 “이것이 2기 대외정책의 완전한 유턴이 될지는 지켜봐야 겠으나, 전통적인 외교 문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당황스러운 노선 변화”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를 재건해 “중동의 리비에라”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등 전직 부동산개발업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반면, 그간 미국이 형식적으로나마 취해왔던 갈등의 ‘중재자’ 역할은 완전히 폐기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그 어떤 지도자도 내놓지 않았던 가장 뻔뻔한 아이디어”라며 “이는 서구 열강들이 지역민들의 자결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중동 지도를 그리고 주민들을 이주시킨 (제국주의) 시대를 연상시킨다”고 짚었다. 워싱턴포스트도 “미국을 중동 분쟁에 더 깊이 끌어들일 방안”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가자지구 주민들을 요르단과 이집트 등 주변국으로 이주시키자고 주장해와 아랍 국가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샀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주민들의 “영구 이주 및 재정착”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가자지구에서 민간인 학살 등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에서 이런 주장을 내놨다.

그는 가자지구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이 됐다며 집단 이주의 이유로 인도주의적 명분을 내세웠으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나크바(대재앙)’, 즉 강제 이주의 역사적 상흔을 안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는 제2의 나크바와 다름 없는 일이다.

강제이주는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 220만명의 삶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정부 당시 밀어붙였던 미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나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불법 점령을 용인했던 포고령 서명보다 훨씬 심각한 조치로 평가된다.

이는 전임 조 바이든 정부는 물론 국제사회가 지지해온 이른바 ‘두 국가 해법’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구상이다.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의 영토 주권을 박탈한다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주권 국가로 공존하는 두 국가 해법 역시 성립될 수 없다.

동시에 주민 강제이주가 그 자체로 ‘인종 청소’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인종 청소란 특정 지역에서 특정 집단을 강제적이고 계획적으로 축출하는 행위로, 제네바협약과 ICC 로마규정은 이를 반인도적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안의 심각성에 따라 국제재판소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범죄에 준해 처벌될 수 있는 중범죄다.

15개월 넘게 이어진 이스라엘의 맹폭에도 여전히 가자지구에서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강제이주 과정이 순탄할 가능성이 낮은 뿐더러, 이 과정에서 미군에 의한 유혈 사태까지 발생한다면 제노사이드 등 더 심각한 전쟁범죄로 비화할 수 있다.

트럼프 구상의 실현 가능성에도 물음표가 찍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 “중동의 다른 나라 정상들과 대화했고 그들도 이 구상을 매우 좋아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런 주장과 달리 이집트와 요르단은 물론 주변 아랍국 모두 강제 이주와 난민 수용에 반대하고 있다.

주변국 입장에선 대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수용하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인 데다 강제 이주 및 팔레스타인 영토 박탈을 용인한다면 내부적으로 거센 비판 여론에 직면할 수 있다.

인남식 교수는 “요르단과 이집트가 아무리 미국의 군사 원조에 의존한다고 해도 200만명이 넘는 대규모 난민을 감당할 여력이 안 된다”면서 “그러면 중동지역 내 다른 아랍 부국들이 부담을 나눠야 하는데, 이들 국가들 대부분이 왕정이고 정통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는 데 협조한다면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 구상을 밀어붙인다면 미국을 ‘제국주의적 패권 국가’로 보고 있는 중동 지역 내 반미 여론이 더욱 확산하는 것은 물론 트럼프 정부가 추진해온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 정상화도 어그러질 가능성이 높다. 사우디는 그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수립을 전제하지 않는 어떤 미국의 중동 정책도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당장 전날부터 시작됐어야 하는 가자지구 2단계 휴전 협상도 안갯 속에 놓이게 됐다. 당초 휴전 2단계에선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완전 철수 및 종전 방안 등이 논의될 예정이었으나, 전후 구상의 판 자체가 뒤흔들린 데다 이스라엘이 철군하는 대신 미군이 주둔을 시작한다면 하마스 입장에선 휴전안을 수용할 이유가 없다.

성일광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그간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로 미뤄봤을 때 100%는 어렵다고 해도 어떻게든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려 할 것이며, 단순한 엄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면서 “당장 휴전 문제를 비롯해 중동지역에 파장이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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