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29일을 침묵 속에 보냈다. LA폭동 33주년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시정부는 몇 줄의 성명만 발표했고, LA한인회 등 단체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념행사를 열지 않았다.
올해는 다들 바빴다. 새 정부 취임, 쏟아진 행정명령, 대형산불, 탄핵, 관세, 조기대선에 숨돌릴 틈 없이 떠밀려 벌써 5월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이해는 하지만 4.29를 잊어도 되는가에 대한 답은 될 수 없다. 특히 LA 한인들에게 4.29는 역사적인 책임이 있다. 김치의 날, 한복의 날과는 다른, 삶의 구체적 아픔이 박힌 날이어서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을 무차별 폭행한 백인 경관 4명에게 내려진 무죄 평결은 도시를 분노로 폭발시켰다. 6일간의 폭동은 63명의 사망자, 2,300여 명의 부상자를 냈고, 거리는 방화와 약탈의 무법천지로 변했다. 그 불길과 약탈의 참상은 엉뚱하게도 LA 한인 사회를 가장 혹독하게 덮쳤다. 2,200여 개 한인 업소가 파괴됐고, 전체 10억 달러 재산 피해의 40%에 달하는 4억 달러를 한인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날 오지 않는 경찰을 기다리며 삶의 터전을 맨몸으로 지켜야 했고, 불타는 가게를 바라만 봐야 했던 한인들의 절규는 30년이 넘은 지금도 사진 속에 아프게 박혀있다.
잊지 말자는 뼈아픈 다짐의 농도가 옅어지는 이유중 하나는 구심력이 없어서다. 기념할 주관단체도, 상징적 공간도 없다.
사실, 4.29는 제대로 기억될 수 있었다. 피해 수습의 결정권을 쥔 일부 한인들의 욕심과 무능력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유례없었던 한인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성금은 무려 1200만 달러에 달했다. 지금 가치로는 2배가 넘는 2650만 달러다. 관리와 집행을 위해 ‘한미구호기금재단’이 만들어졌지만 돈이 모이니 싸웠다. 피해자가 아닌데 피해자라 주장하고, 피해자들을 지켜줬다면서 그 대가를 달라는 단체도 생겼다. 폭동 1년 뒤 남은 돈은 17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 중 90만 달러를 들여 현재 한인타운 6가에 있는 MBC아메리카 건물을 ‘폭동 기념관’ 용도로 매입했다. 운영은 부실했다. 구입 5년 만인 1999년 압류 위기에 매각됐고, 남은 돈 22만 달러도 투자로 날렸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었으나 책임지는 이는 없었다. 성금 유용 의혹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당시 재단의 무능함은 이후 기념단체 재설립에도 걸림돌이 됐다. 폭동 20주년인 지난 2012년 단체를 만들겠다는 이들이 있었지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역사적 아픔을 계승하려는 노력은 다른 커뮤니티에서 배울 점이 많다. 일본계 커뮤니티는 지난 2월19일 리틀도쿄의 혼간지 사찰에서 ‘추모의 날(Day of Remembrance)’ 연례행사를 열었다. 1942년 이날 루즈벨트 대통령이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면서 당시 전국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진주만 공습의 공범으로 몰려 강제수용소로 수감됐다. 서부에서만 12만 명이 자유를 빼앗겼다.
그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일미박물관은 지난 1월부터 새 단장을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강제 수용소 역사를 담은 1만150스퀘어피트 규모의 상설 전시관이 있다. 주제는 ‘미래, 지금 여기: 인종차별의 현실, 민주주의의 꿈’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틀도쿄는 지난해 국립역사보존신탁이 꼽은 ‘사라질 위기의 역사 유적지 11곳’에 포함됐다. 역사를 기억하려 안간힘을 써도 커뮤니티의 존속은 쉽지 않다는 선례다.
4.29는 끝난 역사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과제들을 경고하는 신호등이다. 법 집행의 형평성에 대한 불신, 커뮤니티 간의 몰이해와 반목, 경제적 불평등과 소외는 1992년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해 존재한다. 그날을 기억하는 것은 억울함과 아픔을 되새기기 위함만이 아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외면했을 때 어떤 참담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를 깨닫는 과정이다.
폭동이 흑백 갈등의 폭발이었다면, 그 기억을 잊고 희미하게 만드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34주년 4.29는 역사의 깨달음이 체계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한인회, 상공회의소, LA총영사관 등 우리 모두가 주관 단체라는 책임 자각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그날의 절규가 대물림되어서야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