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탑 위의 천사

2025-05-01

파울 클레의 작품 ‘새로운 천사’.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뭔가를 응시하고 있지만 거기서 금방 멀어질 것 같다. 거센 바람이 그를 하늘로 밀어 올리고 있어서다. 발터 벤야민은 이 그림을 보고 ‘역사의 천사’라는 게 있다면 그도 이런 모습일 거라고 했다. 벤야민에 따르면 우리 눈에 사건들의 흐름으로 보이는 것이 이 천사의 눈에는 잔해 더미의 축적이다. 천사는 잔해 더미에 머물며 조각난 것들을 이어 붙이려 하지만, 미래로 불어대는 거센 바람이 그를 하늘로 밀어붙인다. 그를 따라 잔해 더미도 쓰레기산처럼 하늘로 솟아오른다. 벤야민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란 바로 이 바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3일, 국회 앞으로 밀려드는 계엄군과 시민들을 보다가 뜬금없이 이 천사가 떠올랐다. 그날은 ‘세계 장애인의날’이었다. 장애인들은 장애인 권리 입법을 촉구하며 국회에서 1박2일 투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오후에 국회 본청 앞에서 결의대회가 열렸다. 대표 구호는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였다. 시민권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한 이등 시민으로 살아온 장애인들의 설움이 담긴 구호였다. 결의대회가 끝나자 국회 인근에 노숙 농성장이 차려졌다.

그런데 비상계엄이 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계엄군과 시민들이 밀어닥쳤다. 노숙하던 장애인들도 계엄군을 막기 위해 열심히 싸웠으며 그들이 물러나자 비장애인 시민들과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계엄군이 오기 전 이들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는 시민도 없고 알려는 시민도 없다. 시민권을 제한하겠다는 포고령이 선포되기 전부터 이들이 시민권 제한에 항의하며 지금과는 다른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날의 잔해 더미에 묻혀버렸다.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을 파면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하는 민주공화국의 급박한 일정을 고려할 때, 잔해 더미를 뒤져 이날 튕겨 나간 파편들을 찾아 붙이는 일은 너무도 한가해 보였으리라.

앞선 천사 이야기는 벤야민의 마지막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나치에 쫓기며 그야말로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가운데 글을 썼다. 이 글은 여러 개의 토막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하나에는 비상사태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비상사태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에서는 상례였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억압받는 자들은 비상사태를 일상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이 “파시즘에 맞서는 우리의 입장”을 개선할 수 있고, 우리의 과제가 “진정한 비상상태를 도래케 하는 것”에 있다는 점도 깨달을 것이라고 했다. 독재자들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활용하는 허구적인 비상사태가 아니라, 도저히 이대로는 살 수 없는 억압받은 자들이 요청하는 진정한 비상사태 말이다.

계엄 선포 나흘 뒤 여의도에서 열린 탄핵 요구 집회에서 장애활동가인 민푸름은 벤야민이 당시 사람들에게 던진 물음을 모두에게 던졌다. “무엇이 진정한 비상사태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애인들이 20년 넘도록 거리에서 장애인 권리를 보장하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실태, 게다가 장애인들이 힘들게 쟁취한 권리를 대통령 이름으로 약탈해가는 이 상황이 비상사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내란 종식과 헌정 수호가 최우선 과제인 시기에 왜 장애인의 권리보장이 중요한지, 왜 대통령이 아닌 우리 자신이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대통령을 빨리 바꾸고 싶어 했을 뿐이다.

무엇이 진정한 비상사태냐고 물었던 민푸름과 동료 활동가 박초현과 이학인은 지금 서울 혜화동성당 종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장애인 수용시설들을 운영하면서 장애인 탈시설을 가로막고 있는 천주교에 항의하기 위해서, 또 3만명에 이르는 장애인들을 시설에 가두어둔 채로는 민주주의를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을 외치기 위해서다.

그런데 내 눈에는 난간조차 없는 좁고 위험한 종탑 위로 올라간 이들이 역사의 천사다. “내란을 종식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열어젖히겠다”는 사람들에게, 민푸름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손을 내밀 준비가 돼 있느냐”고 물었다. 벤야민의 말로 하자면 당신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과 연결시킬 준비가 돼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만든다는 민주주의는 내란 종식 후에도 전혀 새롭지 않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슬프게도, 비상계엄이라는 퇴행에 놀란 우리는 진보를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이 궤도 자체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대선이 시작되자 우리를 미래로 떠미는 바람이 불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이 바람에 떠밀려 미래로, 반도체와 인공지능(AI)으로, 소득 4만달러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다른 세상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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