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 꽁꽁 숨긴 ‘천마총 인물화’…‘깔끔쟁이’ 신라인의 화장실 88곳

2025-05-05

수장고에 꽁꽁 숨긴 ‘천마총 인물화’, ‘깔끔쟁이’ 신라인의 화장실 88곳

경주 천마총(6세기초 조성) 하면 어떤 유물이 떠오를까. 1973년 조사된 이 왕릉급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1만1500여점 중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해방 후 우리손으로 처음 발굴된 ‘금관’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그러나 금관보다 더 센 유물이 출현했으니, 그것이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천마도’)였다.

워낙 강한 ‘원투펀치’ 때문에 다른 유물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원투펀치에 밀렸지만…

그 중 천마도 말다래와, 그 밑에 차곡차곡 쌓은 말갖춤새까지 걷어내자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 물체가 있었다.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 위에 그린 채화판(그림판)이었다. 그림판은 상서로운 새를 그린 ‘서조도’와 말탄 인물을 표현한 ‘기마인물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볼 수 있지만 신라에서는 좀체 찾기 어려운 인물도였다. 그러나 이 유물은 박물관 수장고로 직행했고, 40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상온에 노출되면 부서지기 쉬운 ‘나무 껍질’이기 때문이었다.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국립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위해 ‘천마도’를 적외선으로 촬영했다. 이때 ‘덤으로’ 채화판까지 찍었다.

그 결과 채화판의 제작기법과 용도, 그림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채화판’은 자작나무 껍질 2장을 겹쳐 연결한 고리 모양의 판으로 파악됐다. 각 장의 윗면에 ‘서조도’와 ‘기마인물도’를, 아랫면엔 ‘풀꽃 문양’(초화문)과 ‘마름모 문양’(능형)을 표현했다. ‘서조도’는 두 다리와 날개, 긴 꼬리를 가진 상서로운 새를 묘사했다. 그중 적외선 촬영을 통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목 뒤로 넘겨진 머리 끝자락이 세밀하게 묘사된 사람 머리가 새롭게 확인됐다.

‘서조도’는 5~6세기초 신라 고분의 채화칠기에서 상당수 보이는 그림이다. 그중 사람머리 형태의 새는 백제 무령왕릉 은제 탁잔과 금동대향로,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무용총·삼실총·천왕지신총 등에서도 등장한다.

■최초의 신라 인물도

8면 가운데 7개면에서 확인되는 채화 인물도는 신라는 물론 백제에서도 출토 사례가 없는 회화자료다.

각 면에 그려진 인물은 말에 앉아있는 모습을 간단하고 활달한 필치로 묘사했다. 대체로 말은 머리를 쳐들고 있고, 네 다리는 두개 씩 짝을 이뤄 앞 뒤로 뻗어있으며, 꼬리 역시 뒤로 날린 모습이다. 말 등에 올라탄 인물은 말의 움직임에 호응하려고 머리를 약간 뒤로 젖혀있다.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등자(발받침대)에 얹은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뻗은 모습이다. 어깨에는 짧은 활을 걸쳐 멨고, 오른쪽 허리춤에는 화살을 넣은 화살통이 묘사되어 있다. 활을 메고 사냥터로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말에 신분이나 부를 자랑하는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다래, 말방울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말 탄 인물도 모자를 쓰지 않는 민머리 혹은 뒤로 묶은 단순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무늬없는 흰색 저고리와 통이 넓은 검은색 바지만 묘사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등장인물들이 높은 신분이 아님을 암시해준다. 게다가 말탄 인물을 유심히 보면 왠지 앳된 얼굴이다. 동자 혹은 여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때(2010) 적외선 촬영 후 이 채화도는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도 출품되지 못한채 다시 수장고로 들어갔다. 광선이 차단되고, 항온·항습이 유지되는 특수 환경 조건 속에 보관되어야만 했다. 그러니 2010년 언론에 적외선 촬영 보도자료만 공개된 후 지금까지도 외부는 물론, 박물관 내부 연구자들조차 볼 수 없는 ‘은둔 유물’이 되었다. 신라인 스스로 그린 유일한 ‘보통 신라인’의 그림이 수장고에서 ‘은거하는’ 신세가 됐다. 그런 판국이니 연구가 더 진척될 수 없었다.

■신라인이 직접 그린 신라인

최근 이 채색화 중 ‘인물도’를 ‘단편적이나마’ 다룬 논문이 나왔다. 신라 왕경인의 ‘보통의 삶’, 즉 의·식·주를 톺아보는(더듬어 살피는) 학술대회(영남고고학회·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개최)의 발표문이었다. 연구자는 금령총 출토 ‘말탄인물상 도기’(국보)와, 이곳저곳에서 출토된 흙인형(토용 및 토우) 등에 표현된 신라인의 패션을 정리했다.(김재열 국가유산진흥원 남부조사1팀 파트장)

연구자의 발표처럼 신라인의 모습을 그린 회화자료가 있기는 하다. 6세기(541) 중국 양나라를 방문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다. 그러나 ‘양직공도’는 중국인 시선으로 그린 신라 사절의 모습이다. ‘신라인 스스로 그린’ 천마총 채색 인물화와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을 표현한 도기와 흙인형도 더러 출토되었지만 그 역시 손으로 그린 ‘채색화’와도 견줄 수 없다.

채색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1500년 전 경주에서 살았던 보통 신라인의 모습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니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옷은 물론이고, 그 일거수일투족이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채색인물화를 ‘친견한 연구자’가 극소수인만큼 그 가치에 비해서는 연구가 너무도 부진한 편이다. ‘채색 인물화’ 뿐인가. 지금까지 신라고분 하면 금관을 비롯한 황금 제품이나 천마도 같은 독특한 유물들이 주로 각광을 받았다.

연구의 초점도 주로 왕조 및 국왕 중심의 지배층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만들어왔던 이들이 누구인가. 그 시대를 살았던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다. 최근들어 그들이 어떤 집에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살았는지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라엔 적었던 화장실

이와 관련, 학술대회에서 새롭게 제기된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문제가 있었다. 경주에 조성된 ‘화장실’ 유구와 관련된 발표다. 이건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신라라는 나라, 그것도 경주라는 도시가 어떤 곳인가.

<삼국유사>는 분명 “신라 전성기에 서울(경주)에 17만8936호가 1360방 55리에 살았다.(‘진한’조)고 했다. 여기서 언급한 ‘호(戶)=가구수’라면 인구는 80만~90만명(17만8936×4 정도)에 이르고, 만약 ‘호=사람수’라도 17만8936명에 달한다. 게다가 신라는 1000년 가까이 지속된 왕조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까지 전해지거나 조사된 화장실 유구와 유물이 턱없이 적다. 예컨대 휴대용 소변기인 호자(虎子)도 신라 영역에서 전해지는 유물이 3점 뿐이다. 고구려 9점, 백제 20점에 비할 수 없다. 또 2003~2004년 백제의 영역인 익산 왕궁리에서 2·3·5칸짜리 공동화장실이 발견된 이후 ‘화장실’ 연구가 활성화됐다. 이후 부여 쌍북리와 구아리 등지에서 백제 화장실 유구가 잇달아 확인됐다.

■신라인은 배변활동을 안했나?

그럼 신라 사람들은 속된 말로 ‘똥도, 오줌도 싸지 않고 살았다’는 말인가. 물론 아닐 것이다.

신라 왕경 연구는 지금까지 왕궁과 사찰, 방리제(도시 구획), 관청 및 주거 건물 등에 초점을 맞췄다.

신라 왕경이라는 도시 흐름과 구조, 권력공간 등 고차원적인 연구였다. 왕경인의 생활사, 그것도 의·식·주도 아닌 ‘배설’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화장실로 의심되는 유구’도 있기는 했다. 1968년 조사된 인왕동(566번지)과 1987~2002년 사이 발굴된 왕경지구(구황동 황룡사터 동편) 5·13가옥 등이 그랬다. 인왕동 566번지에서는 양변기 모양의 석재가 3기와 함께 각각의 배수관이 아래 배수시설로 모이는 형태의 유구가 확인됐다. 그런데 이 유구는 1968년 발굴 당시 ‘주변 건물에서 모인 물을 배수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됐다.

또 왕경지구(황룡사 동편) 5가옥과 13가옥에서는 대형 항아리를 놓고 주변에 돌을 깔아 조성한 유구가 확인됐다. 보고서에는 이 유구를 ‘변소(화장실)’ 유구로 추정해놓기는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더 이상의 진전된 해석은 없었다. 그러다 백제 영역인 익산 왕궁리에서 명백한 화장실 유구가 확인되면서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도 ‘화장실 유구’와 관련된 관심이 더욱 환기됐다.

■은밀한 북쪽 유구

그러던 2017년 경주 동궁과 월지의 동북쪽 발굴에서 매우 수상쩍은 유구가 확인됐다.

프라이버시를 감안해서 조성된 폐쇄식 화장실의 건물터가 발견된 것이다.

건물 안에 설치된 화장실은 ‘원형 석조’(변기)와, 발디딤돌로 구성되어 있었다. 변기 한가운데 설치된 구멍으로 흘리는 오물이 경사진 배수로를 통해 자연스레 처리되는 것으로 추정됐다.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로 판단됐다. 이후 새삼스레 과거와 현재의 발굴사례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 첫번째 시도가 경주 사람들의 배변 장소를 ‘톺아본’ 연구가 이번 학술대회에서 선을 보였다.(김경열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우선 화장실과 관련해서 그 위치를 주의깊게 보았다. <삼국유사> ‘기이·혜공왕’조는 “대궐의 북쪽 측간(화장실)에서 두 줄기의 연꽃이 났다”고 기록했다. 화장실이 대궐의 북쪽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익산 왕궁리에서 발견된 백제 화장실도 서북쪽에 있었다.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는 화장실을 ‘뒷간’으로 표기했다. 집의 뒤쪽, 즉 북쪽에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사기> ‘만석장숙열전’은 “분(똥)을 받는 도구를 측투(厠牏)”라 했다. 이 구절을 주석한 서광(352~425)은 “‘투(牏)’는 짧은 판으로 만든 담장이고 측간(화장실)은 담장으로 둘러싸 은밀하게 만든 것”으로 이해했다. 후한의 정현(127~200)은 <주례> ‘천관·총재’를 풀이하면서 “웅덩이를 만들어 오물이 흘러 들도록 하여 궁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악취를 없앴다”고 했다.

남송대의 농서인 <진부농서>는 “화장실(분옥)의 구조는 낮은 처마와 기둥을 설치하고 비바람을 피하며 가운데 땅을 파서 벽돌로 벽을 만들어 스며들거나 새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 불교 경전인 <불설안택신주경>은 “문과 담장을 만들고 측간(화장실)을 만들었다”고 했다. 정리하자면 화장실은 구덩이나 구덩이 내부에 돌(벽돌)로 조성했으며, 그 위치는 으슥하고 은밀한 곳에 조성했다는 의미이다.

■도로변 공중화장실

이런 조건을 신라 왕경 조사결과와 대입해보면 어떨까. 변기와 그 부속 시설로 추정되는 석조시설이 북쪽, 혹은 북서쪽에 조성된 경우는 88곳에 이르렀다. 또 석조시설(187곳 대상) 중 우물과 가까운 곳은 79곳에 이르렀다. 담장과 함께 축조된 추정 화장실 유구도 83곳에 달했다.

물론 담장이 없어도 건물에 부속된 유구도 53곳이었다. 배변 활동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굳이 담장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 세가지(석조+북쪽+담장) 필요 충분 조건을 모두 갖춘 화장실은 39개 금입택 중 으뜸이자 김유신의 고택인 ‘재매정지’(사적)라 할 수 있다.

물론 화장실이 없어서는 안될 시설이라면 북쪽 및 북서쪽에 조성된 석조 구조물을 화장실로 보는게 상식적이라는 게 연구자의 견해다. 담장과 곁들여 있거나 건물에 부속되어 있거나, 우물 가에 조성된 석조도 화장실일 가능성이 짙다..

이 중 눈길을 끌만한 화장실 유구가 있다. 경주 동천동 7B/L 유적이다. 이 유적에는 5개의 석조시설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도로변에 놓여 있다. <주례>(주나라 관직제도를 기록한 경전)를 주석한 후한의 유학자 정사농(?~83)은 “‘언(匽)’은 노측(路厠·도로변 화장실)”이라 풀이했다. 그렇다면 동천동 유구는 도로를 오가는 행인이나 인근 청동제작소에 근무하던 장인들이 사용한 공중화장실일 가능성이 짙다. 이와 비슷한 화장실이 인왕동 566번지 유구이다. 양변기 같은 유구가 3기 나란히 서있고, 배뇨관 및 집뇨시설이 확인된 이 유구는 소변 전용 남성 공동 화장실로 추정된다. 이 변기는 대변기라 하기에는 너무 작고 관 또한 대변이 흘러 내려가기에도 매우 좁다.

<삼국유사> ‘의해 이혜동진’에 “돌 위에 오줌(尿)을 누고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삼국유사>가 언급한 이 돌은 남성용 소변기이거나 혹은 2017년 ‘동궁과 월지’에서 확인된 ‘수세식 화장실’ 혹은 불국사 야외전시관에 전시된 발디딤석이 연상된다. 이렇듯 시각의 지평을 넓히자 기왕에 조사된 유적 곳곳에서 화장실로 추정할 수 있는 유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동천동·구황동·성건동·분황사·인왕동·북문로·성동동·황남동·경주박물관 수장고 부지·사정동 등에서 화장실로 볼 수 있는 유구가 줄줄이 확인되었다. 또 황룡사 북편의 건물터 2동도 화장실로 보이며, 건물터 34호 근처에서 확인된 석조물은 소변기로 추정되었다. 과거에 배수시설, 붕괴방지시설, 의례공간, 집수정, 저장시설, 빙고, 옷감염색처 등 별의별 해석을 다해왔던 유구들이었다.

■크산티페의 요강

이 대목에서 반드시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흔히 서양에 비해 동양의 화장실 환경이 열악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예컨대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서울에서는 오줌을 날마다 뜰이나 거리에 내다버리므로 우물물이 모두 짜게 되고 냇다리의 석축가에 똥이 더덕더덕 말라붙었다”(<북학의>)고 했다.

조선주재 영국 부영사였던 윌리엄 리처드 칼스(1848~1929)는 1888년 “아낙네들이 방망이로 옷을 빨고 있는 (청계천) 바닥에 똥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 물을 길어다가 집에서 쓴다…위생관념이 이 정도인 서울 시민이 생존해 있는 사실이 놀랍다”고 디스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동양보다 서양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악처의 대명사라는 크산티페가 아닌가. 크산티페의 욕설을 피해 집 밖에 앉아있던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가 오물을 뒤집어썼다. 부인이 위층 창밖으로 요강을 쏟아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요란한 천둥(아내의 고함)이 치고 나면 비(오줌)가 좀 내릴 것이라고 방금 생각했다”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크산티페가 악처여서 요강을 창밖으로 쏟아버린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예부터 창밖으로 요강 속 오물(심지어 요강까지 통째로)을 던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죽하면 로마의 풍자 시인 유베날리스(쥬베날·기원후 60~130)는 “당신의 머리 위에 요강의 내용물만 쏟아지면 다행으로 여길 줄 알라”고 했단다. 프랑스어로 ‘gardez l’eau(가르데 로)’는 ‘물 조심하세요!’라는 뜻이란다. 그것도 에티켓이랍시고 똥·오줌을 창밖으로 버리기 전에 ‘가르데 로!’를 외쳤단다. 영국인들도 이 프랑스어를 ‘gardy loo!’로 옮겨 그대로 썼단다. 하이힐이 사람의 배설물이 낳은 산물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수세식 시설을 한 화장실은 한 곳도 없었다는 얘기도…. 국왕의 알현을 기다리는 여성들은 선 채로 풍성한 스커트를 보호막 삼아, 남성들은 기둥과 커튼, 테피스트리 뒤에서 생리욕구를 해결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1855년 7월 ‘타임스’에는 “더러운 (탬즈) 강물에서 나는 악취는 끔찍했다. 이제 템스강 전체가 악취를 풍기는 배설물 그 자체였다.”는 고발기사가 실렸다.

■k-화장실의 품격

반면 동양은 어떠했는가. 일찍이 한비자(기원전 280~기원전 233)는 “은(상·기원전 1600~기원전 1046)의 법에는 길에 (분뇨를 처리한) 재를 버리면 형벌로 다스려 그 손을 잘랐다”고 전했다. 길에 오물을 버리면 엄벌에 처했다는 얘기다. 또 서주(기원전 1046~기원전 771) 시대 주나라 궁궐에는 똥·오줌을 물에 흘려보내는 ‘정언(井匽)’이 있었다.(<주례> ‘천관’) 또 <당률소의>(653년 편찬)는 “담장을 뚫어 오물을 배출하는 자는 곤장 60대이 처벌을 받고, 담당관리가 제지하지 않으면 똑같은 벌을 준다”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박제가야 그렇다 치지만 19세기 서울을 방문한 윌리엄 칼스는 대체 무슨 자격으로 ‘서울 거리=똥덩어리’로 손가락질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더욱이 최근 연구결과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 화장실로 보이는 유구가 최소한 88곳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가 등장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삼국시대부터 푸세식이든, 수세식이든, 혹은 푸세-수세식 절충형이든, 화장실을 조성하고 배설물을 처리했던 동양, 아니 한국의 풍속이 더 깨끗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깔끔쟁이들’였으니 요즘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쾌적한 ‘K-화장실’이 탄생하지 않았을까.(이 기사를 위해 김경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와 유병하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성재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전용호 국가유산청 학예연구관, 이현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김경열, ‘신라 왕경인의 측간’, <신라 왕경인의 삶-톺아보기>(영남고고학회 제34회 정기학술발표회 논문), 영남고고학회·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5

김재열, ‘신라 왕경인의 복식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 <신라 왕경인의 삶-톺아보기>(영남고고학회 제34회 정기학술발표회 논문), 영남고고학회·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5

유병하·성재현, ‘천마총 출토 채화판에 대한 기초적 검토’, <동원학술논문집 제11집>, 국립중앙박물관, 2010

권순홍, ‘한국 고대 도시의 오물 처리와 근교 농업-도시의 생태환경사 연구 시론’, <생태환경과 역사> 제6호, 한국생태환경사학회·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 2020

박세령, ‘한국 화장실 구조를 통한 비교 연구’, 동아대 석사논문, 2023

전용호, ‘익산 왕궁리 유적의 화장실에 대한 일고찰’, <백제학보> 2권2호, 백제학회, 2010

국가유산청, <천마총:발굴조사보고>, 1974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신라왕경 황룡사지 동편 SIE1지구 발굴조사보고서>(학술연구총서 32), 2002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경주 556·566번지 유적 발굴조사보고서>, 2006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왕궁리 발굴 중간 보고 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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