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불혹’이 된 날, 한선수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공을 올렸고, 여전히 현역 최고 세터로 군림하고 있다[남정훈의 오버 더 네트]

2025-12-16

[인천=남정훈 기자] 불혹(不惑). 공자의 논어에서 유래한, 나이 40세를 이르는 말이다. 40세가 되면 인생의 중심을 잡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판단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프로배구 대한항공의 아이콘이자 팀 역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세터 한선수도 마흔번째 생일, 진짜 불혹이 된 날, 승리라는 멋진 선물을 받았다. 코트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자신의 볼배급에 대한 확신과 상황마다 어디로 올려야 가장 상대를 힘들게 만들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어느덧 V리그 최고령 선수지만, 그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뛰면서 리그를 지배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16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남자부 3라운드 현대캐피탈과의 홈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3-0(29-27 27-25 25-23) 완승을 거뒀다. 지난 12일 부산 OK저축은행 원정에서 0-3 셧아웃 패배를 당했던 대한항공은 이날마저 내줬다면 독주 체제가 흔들릴 뻔 했지만, 승점 3을 완전히 챙겨가며 승점 34(12승2패)로 승점 26(8승6패)에 그대로 머문 현대캐피탈과의 승점 차를 8로 벌렸다. 다시금 독주 채비를 마친 대한항공이다.

1985년 12월16일 생인 한선수는 자신의 마흔번째 생일날 치러진 1,2위 간의 맞대결에서 코트 위 사령관으로 제 몫을 다 해냈다. 이따금 흔들리는 모습도 나왔고, 이단 연결한 공이 상대 코트로 넘어가는 모습도 노출했지만, 승부처에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세트 스코어는 3-0이지만, 세트별 점수는 모두 2점 차에, 1,2세트는 듀스 접전으로 치러진 경기였다. 한 끗 차이에 의해 갈린 승부에서 대한항공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한선수의 존재감이 컸다.

생일날 승리라는 최고의 선물을 챙긴 한선수는 경기 뒤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을 찾았다. 한선수는 “승리하긴 했지만, 좋은 경기력은 아니었다. 기록되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은 범실이 꽤 나왔다. OK저축은행전에선 그런 게 많이 나와서 완패를 당했는데, 오늘도 그 여파는 아직 있는 것 같다”라면서도 “상대가 2위인 현대캐피탈이다 보니 선수들이 투지를 갖고 경기에 임한 덕분에 이긴 것 같다.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체력적으로 모두 피곤한 상황이다. 범실을 줄여야 한다”라고 냉정한 진단을 내렸다.

마흔번째 생일을 언급하자 쑥스런 표정을 짓던 한선수는 “다들 축하한다며 오는데, 축하를 받아야하는건지...그래도 지금까지 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많은 분들이 아직 응원해주시고 좋아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좀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뛰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이어 “내 생일은 항상 시즌 중에 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딸들 셋 하교 후에 저녁에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면서 “팀 안에서는 생일 파티 이런거 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다들 생일은 있는거니 각자 생일 축하하자고 했다”고 덧붙였다.

18년 전 2라운드 2순위로 대한항공 유니폼을 받아들었던 20대 초반의 젊은 세터는 적응하는 데 바빴다. 프로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마흔번째 생일까지 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 젊은 세터는 불혹이 됐지만, 여전히 V리그 최고의 세터로 군림하고 있다.

그 비결은 역시 젊은 시절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는 체력 덕분이다. 헤난 달 조토(브라질) 감독 부임 이후 체력 훈련을 크게 강화했고, 덕분에 한선수도 근육량이 3% 이상 늘어날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한선수는 “시즌 중에도 비시즌 때랑 똑같이 훈련하고 있다. 시즌 전엔 웨이트 트레이닝이 훨씬 힘들었지만, 지금은 강도는 줄였어도 횟수는 똑같다. 주 4회를 채운다. 만약 하루를 쉬었다고 하면 그 다음날에는 불 운동과 웨이트를 다 해야 한다. 쉬는 게 마냥 좋은 게 아니다”라면서 “핑계를 대고 싶진 않다.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은퇴를 해야 한다. 젊은 선수들과 똑같이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20대의 창창한 나이 때와는 회복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 열외는 가능할까? 한선수는 “볼 운동하는 날에만 전날 경기가 있거나 하면 볼 감각만 체크하고 빼주기도 한다. 그럴 때 러셀이 ‘선수, 왜 가냐고’라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왕성한 체력 훈련 덕분에 전성기 시절의 운동능력을 유지한 덕분일까. 이날 한선수는 상대 코트로 넘어가는 공을 오버네트를 피하면서 싱글핸드 토스로 공격수들에게 올리는 명장면을 여러 번 연출했다. 1세트엔 현대캐피탈 벤치에서 오버네트 판독을 신청했지만, 판독 결과 아슬아슬하게 오버넷을 피한 것으로 나왔다. 이에 대해 묻자 “넘어가는 공을 평소처럼 잡으면 공에 손이 눌리면서 코트를 넘어가 오버네트가 된다. 그런 장면을 피하기 위해 손가락 2~3개로 넘어가지 않게 하면서 올린 덕분이다. 최대한 손가락을 세워서 어떻게든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2007~2008시즌에 데뷔해 18번째 시즌을 치르고 있는 한선수. 내심 20번째 시즌까지 욕심이 날 법 하다. 이에 대해 묻자 한선수는 “우선 계약이 내년 시즌까지다. 19번째 시즌까지는 가는데, 이후는 봐야죠. 어떻게 될지 모르죠. 열아홉에서 끝날지, 더 뛸지. 우선 지금 몸 상태는 너무 좋다. 시즌 끝나고 그 얘기는 다시 하시죠”라며 웃었다.

10년 이상 대한항공의 ‘캡틴’을 맡아 팀을 이끌었던 한선수는 올 시즌을 앞두고 주장 완장을 10살 어린 후배 정지석에게 넘겼다. 완장의 무거움을 내려놓은 게 플레이하는 데 편안함을 주는 게 아닐까. 한선수는 “주장에 대한 애착보다는 대한항공 팀에 대한 애착이 강해 오랫동안 주장을 맡았던 것 같다. 신인부터 쭉 뛰어온 팀이고, 이뤄낸 결과도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주장직을 내려놓긴 했지만, 여전히 팀의 일원이자 코트 위에선 세터가 리더가 되어 해야할 역할도 있다. (정)지석이를 잘 도와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주장 정지석은 전 주장 한선수가 보기에 어떨까. 그는 “주장이란 자리가 한순간에 잘 할 수는 없는 자리다(웃음)”라면서 “지석이는 자기 플레이가 되어야 하니까 자기 플레이에 먼저 신경썼으면 한다. 그게 되면 자연스럽게 팀을 끌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오랜기간 국가대표 주전세터로 뛰었던 한선수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태극마크도 내려놓았다. 다만 내년엔 2026 나고야-아이치현 아시안게임을 비롯해 아시아선수권 등 굵직한 대회가 많다. 지금 보여주는 기량이라면 한선수가 다시 국가대표 주전 세터를 맡는다해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다.

태극마크를 다시 달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한선수는 “저는 항상 대표팀에 뽑히면 감사하다고 생각해왔다. 뽑힌다면 최선을 다해 뛰겠다”라면서 “아시안게임은 네 번 나가서 금메달을 한 번도 따지 못했다. 내가 나가서 못 딴 건 아닌가...황택의나 한태준 같은 젊은 세터들이 좋은 세터들이기 때문에 제가 없어도 충분히 잘 해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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