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는 언제나 ‘남성상위’…넷플릭스 영화 ‘오늘의 여자 주인공’

2024-10-23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성범죄를 당하지 않으려면 여성이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막상 조심하면 “지금 나(또는 모든 남성)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것이냐”며 화를 내는 상황 말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매도”하지 않고 호의를 받아들이거나 신뢰했을 때 위험에 노출된 여성들은 멍청하고 무방비하다고 비난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태어난 순간부터 무수한 위협에 노출되면서도 남성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배운 여성들은 ‘식스 센스’, 여섯 번째 감각을 획득한다. 일명 ‘쎄함 레이더’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미묘하고 촘촘한 폭력의 기운을 감지한다. 하지만 무고한 남성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니까 이 레이더의 신호를 무시하는 훈련도 해야 한다. “너무 예민한 거 아냐?” “넌 얼굴이 무긴데, 뭐가 걱정이야” 같은 말로 무안을 당하지 않으려면 줄타기 무형문화재에 버금가는 균형감이 필요하다. 10월18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오늘의 여자 주인공(Woman of the Hour)>은 여성들의 이 같은 아슬아슬하고 치열한 생존 감각을 살린 범죄 스릴러이다. 배우 애나 켄드릭의 첫 연출작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한 여성이 데이트 쇼에 출연한다. 그런데 ‘최종 선택’을 한 ‘3번 독신남’이 연쇄살인마란다. 요즘처럼 일반인이 출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홍수이고, 툭하면 출연자를 둘러싼 ‘논란’이 터지는 상황에서 ‘데이트 상대자로 나온 사람이 연쇄살인마?’ 생각만 해도 맵다 못해 어지러운 설정이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이 더 극적인 법. 이 영화는 무려 ‘실화’ 바탕이다.

영화의 첫 부분, 로드니(다니엘 소바토)는 한 여성의 사진을 찍고 있다. 로드니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며 포즈를 지시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여성은 그런 로드니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이 전 남자친구와 헤어져 혼자 아이를 낳았고 가족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결핍을 털어놓는다. 쓰다듬으며 위로하던 로드니는 돌변하여 여성을 공격한다. 다음 장면에서 배우 지망생 셰릴(애나 켄드릭)은 오디션을 보고 있다. 심사 과정에서 노출이나 수영복 차림을 요구하는 문제가 번번이 셰릴의 발목을 잡는다. 계속해서 오디션에서 떨어지던 셰릴은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데이트 쇼에 출연하자는 에이전시의 요구에 응한다. <데이팅 게임>은 1명의 여성이 출연해서 벽 너머에 있는 3명의 남성과 대화를 하고, 데이트할 우승자 1명을 선정하는 내용의 생방송 쇼이다. 남성들을 ‘1번 독신남’ ‘2번 독신남’ ‘3번 독신남’처럼 익명화하고 번호를 붙여 호명한다는 점에서 <짝>이나 <나는 솔로> 같은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한다. 데이트 프로그램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성별 규범과 성 각본, 당대 연애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재현하는 장치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지만, 여성 출연자인 셰릴이 겪는 일은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자는 셰릴이 뉴욕대 출신임을 알고 이렇게 조언한다. “누가 봐도 똑똑한 여자지만 무대에서는 너무 똑똑하면 안 돼요. 남자들이 기가 죽잖아요. 남자들은 아기 같잖아요.” 그리고 “몸매도 되는데 써먹어야지”라며 셰릴의 의상을 교체하라고 지시한다.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은 남성의 기를 죽이지 않되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운 존재여야 한다는 것은 낡았으나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젠더 규범이다. 이처럼 여성의 위치를 조정하고, 남성의 우위를 기본값으로 여기는 연애 문법은 위계와 폭력을 배양한다. 남성성이 폭력과 연동되는 방식이다.

1970년대 미국 데이트쇼 배경

주인공 선택 독신남은 ‘살인마’

위협 느껴도 애써 상황 외면

남성 기분 우선하도록 배운 탓

지금도 젠더 위계질서는 여전

거절을 ‘무례함’으로 보는 사회

여성 자발성 존중될 때 안전해져

영화는 셰릴이 데이트 쇼에 출연하는 과정과, 로드니의 가해 사실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시간성 안에서 로드니는 가해 행위를 할수록 데이트 쇼에서 호감을 얻게 된다. 그가 질문에 능숙하게 대답하고, 여자는 언제나 자신이 차지한다고 단언하는 자신감은 여성을 속여 안심시킨 뒤 폭력으로 제압한 경험에서 나온다. 이러한 편집은 데이트 쇼가 은유하는 현실의 이성애 관계와, 로드니가 여성에게 접근하는 과정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젠더 위계와 성 각본을 전제하는 로맨스가 얼마나 폭력에 취약한지 폭로한다. 로드니를 만난 피해자와 셰릴은 다르지만 유사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친밀한 남성과의 관계에서 돌연 튀어나오는 위협의 징조이다. 부드러운 천을 쓰다듬던 중 불쑥 손바닥을 찌르는 듯 행동하는 폭력성은 너무나 사소하고 기묘해서, 처음부터 거부하거나 제지하기 어렵다. 로드니의 피해자들은 친절한 얼굴로 접근했던 그가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길 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셰릴은 친근하게 지내던 이웃과 술을 마시던 도중 그가 갑자기 성적으로 접근하자 당황한다. 한잔 더 하잔 말을 셰릴이 거절하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안 좋아진다. 침묵, 타인의 불쾌한 표정, 자신이 불편한 분위기를 유발했다는 압박감은 화합과 배려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학습해온 여성의 목을 조른다. 이 긴장감은 다분히 여성적이다. 여성만이 안다. 셰릴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한잔 더 하겠다고 말한다. 다음 장면에서 셰릴은 그와 침대에 누워 있다. 무척이나 심란한 표정으로.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살피고 중재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다. 셰릴은 데이트 쇼에서 우승한 로드니와 데이트하던 중 그의 칭찬을 “좀 과장됐다”며 웃어넘기는데, 그때부터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듣기는 좋다고 뒤늦게 수습해보지만 로드니는 컵을 탕 내려놓는다거나 갑자기 말을 끊고 침묵을 유지하며 압박을 가한다. 결국 셰릴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사과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한다. 남성들은 자신이 기분으로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셰릴을 압박한다. 이는 젠더 위계가 실재하는 현실에서 여성의 자발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셰릴은 이미 불길함을 느낀 상황에서 로드니가 전화번호를 묻고, 데려다주겠다며 따라오는 것을 거절하지 못한다. “혹시 내가 쓸데없이 예민하게 군 것일까봐” 혹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선택이 상황을 악화시켜서 더 위험해질까봐 ‘No’를 외칠 기회를 계속해서 유예하는 경험은 여성들에게 보편적이다.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여성의 거절을 무례함 혹은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번역한다. 여성들은 상대의 기분을 위해 거절을 포기하고 그로 인해 위험에 노출되지만, “왜 그때 저항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냐”는 비난을 받는다. 프로파일러 권일용이 일명 ‘호감형 연쇄살인마’라고 불렸던 강호순의 수법을 분석한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범죄를 저지른 동네에는 주민 차량에 쉽게 동승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강호순이 이를 이용해 ‘차에 타지 않으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만들어 피해자를 통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쇄살인마가 어떻게 TV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을까? 실화에서도, 영화에서도, 로드니는 경찰에 신고를 당한다. 그러나 경찰들은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누적되는 신고를 무시하고 방치했다. 영화에서 데이트 쇼를 관람하러 온 방청객 중에는 피해자의 친구였던 로라가 있다. 로라는 친구가 살해당한 직후에도 경찰에 신고했지만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정하고 상냥한 로라의 남자친구는 로라의 확신이 “100%는 아니”라며 부정한다. “정말 범인이라면 감옥에 있어야지 어떻게 TV에 나오겠어? 참가자들 신원도 확인 안 했을까? 경찰이 수사해봤는데 혐의가 없었나 보지.” 그리고 바로 사랑한다는 말로 로라를 달랜다. 로라의 남자친구는 분명히 로라를 사랑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과 무관하기에 고통과 폭력에 한껏 이성적일 수 있다. 여성의 증언은 언제나 감정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그들만이 감지하는 영역은 중요하지 않다고 격하된다. 로라는 총괄 프로듀서를 만나고자 용기를 내지만, 경비원은 거짓말을 하고 로라를 방치한다. 로라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더라면 셰릴이 위험해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로라는 최선을 다한다. 다음날 경찰에도 신고하러 가지만, 경찰들은 안일한 태도로 책임을 회피할 뿐이다. 결국 로라는 일 좀 제대로 하라고 소리를 지르다 경찰서를 박차고 나온다. 이후 로드니는 또 다른 범죄를 저질렀고, 체포되었을 때는 추정 피해자가 130여명에 이르렀다.

<오늘의 여자 주인공>이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셰릴은 데이트 쇼의 주인공이지만, 피해자를 꼭 사진으로 남겨두는 로드니의 다음 타깃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영화는 또한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피해자를 시각적 스펙터클로 이용하지 않으려 한 고민이 돋보인다. 섬세하고 밀도 높은 여성 스릴러를 통해 친밀한 관계의 폭력, 거절과 자발성의 의미를 탐색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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