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 엄지를 펼치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접어 ‘엄지 척’ 모양을 만든다. 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만 펴 왼손 엄지에 갈고리처럼 건 뒤 뒤로 잡아당긴다. 손으로 “탄핵”을 말하는 방법이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무대를 본 시민들은 모두 이 동작을 봤다. 유튜브나 뉴스 중계로 집회를 본 이들도 그랬다. 무대에는 사회자, 가수, 시민 발언자가 수도 없이 오르내렸는데 내내 무대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다시 만난 세계’ 노랫말부터 군중이 외친 “탄핵해!” 구호까지 농인(청각장애인)에게 수어로 현장 상황을 빠짐없이 옮긴 통역사들이었다.
수어 통역사 김가연(34)·김윤경씨(36)는 14일 서울 여의도 집회 현장에서 기자와 만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비상사태를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며 “집회도 참석하고 수어 통역이라는 일의 장점도 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은 통역사 4명이 돌아가며 무대에 올라 시민 발언과 구호, 노래 등을 모두 수어로 전했다. 지난 3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 긴급 담화 당시 뉴스특보를 편성한 지상파 3사, 종합편성채널 4사 중 수어로 동시통역을 제공한 방송사는 KBS뿐이었다.
김윤경씨는 “주위의 농인 중에 계엄 당시 상황을 빨리 파악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며 “1980년 광주에서는 농인 김경철씨가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계엄군에게 구타당해 사망했는데, 이번에도 농인들이 소외되는 건 똑같았다”고 했다. 김씨는 “집회에 참가한 사람 중에도 분명히 농인이 있을 텐데, 이들에게 집회 분위기를 더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집회는 통역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곳이다. 정제된 내용의 공식 발표 또는 방송과 달리 집회 현장에선 갖가지 변수가 돌출한다. 소음도 통역을 방해하는 요소다. 대규모 인파가 내는 소음 탓에 발언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통역사들은 진땀을 흘린다. 김가연씨는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발언 내용이나 노래 가사가 잘 안 들렸다”며 “일반적인 페스티벌이나 공연에는 사전에 가사를 완벽히 숙지하지만, 집회에선 현장 상황이 계속 바뀌어 대처하는 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평소에 수어로 옮겨본 적 없는 ‘탄핵’ ‘비상계엄’ ‘소추안’ 등 익숙하지 않은 단어도 난관이었다. 김가연씨는 “정치 뉴스를 자주 전하는 통역사가 아니면 ‘탄핵’이나 ‘소추안’ 같은 단어 자체가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며 “그만큼 우리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있다는 사실이 와닿았다”고 했다. 김씨는 “저희도 비상시국 상황에 맞게, 이전 집회 영상을 계속 돌려보며 어떤 수어가 나왔는지 복습하고 연습했다”고 말했다.
장애를 등한시하는 세태는 탄핵 촉구 집회 현장에서도 나타났다. 무대를 오가는 취재진과 추최 측 관계자, 그리고 집회 참가자가 든 깃발이 수어 통역사 앞을 가려 통역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기 일쑤였다. 김윤경씨는 “사람들이 방송 프로그램이나 뉴스에 자막이 나오는 걸 당연하게 느끼는데, 그만큼 수어 통역의 중요성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가연씨는 “뉴스나 방송에서 수어 통역사는 전체 화면의 16분의 1 정도로 아주 작다”며 “집회에서도 무대 가까이 있지 않은 분은 통역사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농인은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다”며 “이들이 느낄 불편함에 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수어 통역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