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해줘 고맙다”는 한국에 “기억해줘 고맙다”고 화답한 그리스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5-01

그리스는 공산주의를 미워하고 북한에 비판적인 나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점령 통치를 받은 그리스는 해방 이후에도 정부군과 공산주의 반군 간의 내전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그리스는 아직 내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인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여 신속히 파병 대열에 동참했다. 오늘날 북한을 바라보는 그리스의 인식은 2022년 12월 당시 외교부 장관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이웃나라이자 영토 분쟁 등으로 앙숙 관계인 튀르키예가 탄도미사일 발사 위협을 가하자, 그리스 외교장관은 이를 “북한식 태도”로 규정하며 강력히 성토했다.

2004년 4월 훗날 유엔 사무총장에 오른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이 그리스를 방문해 6·25 전쟁 참전용사들과 오찬을 함께했다. 알렉산드로스 카라차스 참전용사는 1951년 10월 강원 철원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배에 포탄 파편을 맞고 죽을 뻔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다행히 곁에 있던 한국인 군무원이 피투성이가 된 카라차스 용사를 가까스로 전장에서 끌어내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카라차스 용사는 “그 한국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 이 점심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 반 장관을 수행해 그리스에 갔던 임수석 외교부 서기관(현 주스페인 한국 대사)이 오찬장에서 카라차스 용사 바로 맞은편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감명깊게 들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18년 임 서기관은 고위 외교관으로 성장해 주그리스 대사에 임명됐다. 아테네에 부임한 그는 카라차스 용사의 근황부터 수소문했는데, 3년 전인 2015년 노환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21년 한국·그리스 수교 60주년을 맞아 임 대사는 그리스 유력 일간지에 기고한 ‘노병(老兵)의 눈물과 한국·그리스의 우정’이란 글에서 카라차스 용사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에 고인의 아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이메일을 임 대사에게 보냈다. “대사님의 글을 읽고서 이번에는 제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 아버지를 기억하고 존경심을 보여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6·25 전쟁을 계기로 맺어진 그리스 어느 부자(父子)와 한국의 인연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스테파노스 기카스 그리스 해양·도서정책부 차관이 지난 4월30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는 기념관 건물 앞 광장에 세워진 6·25 전쟁 그리스 참전 기념비에 헌화하고 전사자들을 기렸다. 그리스는 전쟁 기간 연인원 4992명의 군인을 한국에 파병했고 그중 186명이 장렬하게 산화했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이 점을 들어 “고마운 나라”라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자 기카스 차관은 “참전 기념비에 헌화하며 매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며 “그리스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해줘 고맙다”고 화답했다. 우리는 참전해준 점만으로 감사할 따름인데, 그리스는 그 사실을 기억해줘 고맙다고 한다. 두 나라의 우정이 영원히 지속하길 고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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