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기 도탄 빠진 민생 구하려 동분서주
개화·수구 이분법적 진영 논리의 희생양으로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8일) 을미사변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고종의 신변이 더욱 위태로워졌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었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한 5명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포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홍집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군중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정병하는 순검들에 의해 참살되었다.
을미사변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갑오 개화파의 친일 근대화 노선에 대한 피의 복수이자 일본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반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아관파천은 1884년 12월 3일(양력)에 일어났던 ‘3일 천하’ 갑신정변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재가 목숨을 잃었을뿐더러 이후 끊임없이 일어난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킨 원인이기도 하다. 권력투쟁과 노선경쟁이야 현실 정치에서는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정적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권력의 무상함과 잔인함을 또 한 번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인물이 있다. 그는 1848년생 수원 출신의 어윤중(魚允中)으로 고종의 살생부에 들어있지 않았음에도 2월 17일 경기도 용인에서 그곳 마을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비록 그가 갑오개혁기 탁지부 대신을 역임했지만 고종도 그의 재정 운영 능력을 높이 살 정도로 유능한 관료였다는 점에서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윤용선·박정양 신내각은 어윤중의 횡사를 크게 애석하게 여겨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관계기관에 명령했다. 심지어 김홍집 내각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긴 시골선비 황현마저 어윤중을 두고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여 어떠한 어려움도 피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역사가 박은식은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고 적었다. 당시 소문과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살인자가 평소 어윤중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다느니 친러파 인사에게 사주를 받아 살해했다느니 하는 엇갈린 주장이 나왔다.
그의 억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급진개화파도 아니었고 위정척사파도 아닌 까닭에 훗날 각각 그들의 추종자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는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단원으로 일본 대장성을 조사하였을뿐더러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부국강병의 길을 찾고자 했음에도 임오군란 때 청군과 함께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친청 수구파로 몰렸다. 또 그는 1883년 8개월 동안 평안도와 함경도의 압록강·두만강 인접 고을을 비롯한 50여 개의 고을을 돌아다니며 청과 대등한 통상협정을 체결하고자 했고 환곡 혁파, 소민 보호 등 함경도 개혁을 단행하여 민생을 도탄에서 구했으며 갑오개혁 때 근대 재정개혁을 단행했음에도 김홍집 내각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친일 개화파로 매도당했다.
그는 친일과 친청, 개화와 수구의 이분법적 진영 논리를 넘어서 오로지 국익의 증대와 민생의 안정을 꿈꾸었음에도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국내정치와 국제정세의 추세에 발맞추어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강구했고, 동양의 ‘스위스’가 되어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군비 부담을 줄여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으나 허망한 죽음으로 그의 원대한 꿈은 사라졌고 나라마저 일제에 병탄되었다. 현재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없더라도 국가와 민생을 향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기억해야 하지 않는가. 특히 오늘의 난국에 비추어 볼 때, 갑갑함을 감내할 수 없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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