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하숙의 기분 좋은 부작용

2025-03-14

오래전 학교 부근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한 달 하숙비 13만원에 친구와 큰 방을 같이 썼다. 방이 꽤 많은 집이라 하숙생이 스물대여섯 살았는데 다른 학교 학생은 물론, 고시생과 직장인도 있었다. ‘응답하라 1994’의 ‘해태’와 ‘삼천포’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20대 청춘답게 서로 많이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중년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하숙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대학이 몰려 있는 신촌 일대에선 새 학기를 맞아 하숙을 구하려는 학생이 줄을 이어 여름 방학까지 예약이 꽉 찬 곳이 많다는 것이다. 10년 전 뉴스에선 대학가 하숙집을 독거노인이 채운다고 혀를 찼다. 독립생활을 원하는 대학생은 원룸과 오피스텔로 빠져나가고 외롭고 돈 없는 노인만 대학가 하숙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랬던 하숙촌에 학생들이 돌아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비용 문제 때문이다. 방값에 일정액만 추가하면 하루 두 끼 집밥을 먹을 수 있고 전기료나 난방비를 따로 낼 필요도 없으니, 가성비가 훌륭한 것이다. 대학 내 학생 식당의 메뉴가 5000원을 훌쩍 넘기고 공공요금 또한 가파르게 올라가는 현실에서 하숙은 그야말로 매력적인 주거 방식이 됐다.

대학생들에 값싼 하숙집 다시 인기

빈방 채웠던 노인 입주자들과 동거

새로운 인간관계 조합 만드는 계기

세대 간 경험과 지식 교환 장 되길

한국의 물가상승이 하숙 인기를 몰고 온 것처럼 미국의 고물가는 ‘붐 메이트(Boom-mate)’ 열풍을 불러 왔다. 붐 메이트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와 청년층이 함께 사는 주거 형태를 의미한다. 집은 있으나 퇴직한 뒤 소득이 부족한 노년층과 치솟는 임대료 부담에 허덕이는 청년층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의외의 조합을 만들어낸 것이다. 경제적 이유로 출발했지만 생활 공간의 공유는 의도치 않은 세대 통합의 효과를 내고 있다. 청년은 저렴한 임대료를 내는 대신 집안일을 돕거나 돌봄 활동을 제공한다. 노인은 청년에게 요리와 같이 오랜 경험이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청년은 노인에게 스마트폰 사용법 같은 새로운 지식을 알려줄 수도 있다. 고령자와 젊은 세대의 동거만 전문적으로 주선하는 업체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들 업체는 아예 세대 간 유대를 강화하는 동거 형태를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청년과 노인이 함께 여가 활동을 즐기거나 봉사활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식이다.

경제적 이유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관계의 새로운 조합이 쇠락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사례도 있다. 일본의 한 대학 축구부가 노인들이 모여 사는 주택 단지 일부를 기숙사로 활용하면서 생긴 일이다. 2020년 가나가와 대학 축구부는 지은 지 50년이 넘고 주민 평균 연령이 66세인 공영 주택 단지에 입주를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 빈집이 많고, 상점도 하나둘 문을 닫고 사라진 아파트였다. 축구부원들은 엘리베이터가 없어 비어 있던 4층과 5층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의 독특한 기숙사 생활이 아파트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 냈다. 단지 내 곳곳을 청소하고 소방대 활동을 지원하며 지역 농산물 재배에도 참여했다. 혼자 지내는 노인을 위해 카페도 열어 식사와 함께 노인을 위한 체조와 운동 프로그램도 제공했다.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이제 카페는 지역 공동체의 복원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축구부 감독은 주민과의 교류와 공감 과정에서 익힌 소통 능력이 인간적 성장은 물론, 선수로서의 기량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여러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 필연적으로 접촉이 생긴다. 한 번의 접촉은 곧 수많은 상호작용으로 이어지며,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관심이 때로는 불편과 짜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적당한 관심과 상호작용은 함께 사는 재미를 알게 해 그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하숙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우울한 경제 뉴스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숙 생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또래 친구와의 만남과 대화가 의도치 않게 연대와 통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숙의 기분 좋은 부작용은 조각난 사회의 외로운 사람들을 파고드는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옆 사람과 소통하는 시간이 줄어든 요즘, 학생들이 따뜻한 집밥을 함께 먹으며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웃음 짓는 하숙집을 그려 본다.

이재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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