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의약품 소매시장이 처음으로 30조원을 돌파했다. 의정 갈등에 따른 장기처방이 늘어난 데다 코로나19, 독감 등이 유행하면서 의약품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일반의약품 가격 인상과 의정갈등 해소에 따른 전문의약품 수요가 회복될 경우 올해 역시 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4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의약품 소매 경상금액(판매액)은 31조2367억원을 기록, 지난해 29조3707억원 대비 약 6.3% 성장했다. 판매액이 30조원을 넘은 것은 통계 집계 이래 지난해가 처음이다.
지난해 국내 의약품 소매시장은 1분기를 제외하고 2분기(7조6160억원), 3분기(7조9438억원), 4분기(8조968억원)까지 매 분기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특히 4분기는 사상 처음 분기 판매액 8조원을 돌파했다.
이 같은 성장에는 만성질환자 증가, 고령화 등 사회적으로 의약품 수요가 늘고 있는 추세와 함께 작년 2월 발생한 의정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전공의 집단 사직에 따라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진료가 어려워지면서 한 달 이상 장기처방 환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전염병 유행도 의약품 수요를 끌어 올렸다. 실제 지난해 7월부터 유행한 코로나19는 8월 둘째 주 들어 입원환자 수가 1357명까지 늘며 정점을 찍었다. 비슷한 시기 수두, 백일해, 마이크로플라즈마 폐렴 등도 동시 유행하며 의약품 구매가 늘었다.
가을에는 역대급 독감 유행도 발생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4년 마지막 주(12월 22~28일) 전국 인플루엔자 표본감시 의료기관 300곳을 찾은 외래환자 1000명 가운데 독감 증상을 보인 의심환자 수를 나타내는 독감 의사환자(ILI) 분율은 73.9명으로 2016년 86.2명 이후 8년 만에 최고 수준을 보였다. 이로 인해 작년 12월 의약품 소매 판매액은 역대 최고치(2조7632억원)를 기록했다.
의약품 소매시장 성장에 따라 전체 의약품 시장 성장도 예상된다. 하지만 제약사 실적 개선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란 분석이다. 진통, 해열제 등 상비약 구매가 크게 늘면서 수익성이 낮은 일반의약품이 전반적인 소매시장 성장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급종합병원 운영이 차질을 빚으면서 고가 전문의약품 처방은 정체 혹은 줄었을 가능성도 높아 제약사 입장에선 소매시장 성장만으론 성에 차지 않는 상황이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일반의약품 중심인 소매시장이 커졌다는 것은 대형병원 진료 차질, 전염병 유행 등으로 상비약 비축 수요와 일부 제약사 약가 인상 등이 복합 작용했다”면서 “회사 수익성 측면에선 항암제 등 고가 전문의약품 판매가 늘어야 하는데 의정갈등 여파로 수요가 늘지 않아 소매시장만으론 실적 개선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올해도 의약품 소매를 포함해 전반적으로 성장을 이어가겠지만 규모는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의정갈등이 해소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높아 전문의약품 수요 회복이 기대되는데다 박카스, 탁센, 용각산쿨 등 일반의약품 가격도 줄줄이 인상된다. 반면 정부의 지속적인 전문의약품 약가 통제 등으로 성장률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 대표는 “고령화, 만성질환자 증가, 의정갈등 여파 등이 작용해 전반적인 의약품 수요는 지속될 것”이라며 “국내 의약품 시장은 성장을 지속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약가 통제로 성장률은 미미할 것이라 제약사 해외진출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