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탑텐(TOP10), 지오지아, 앤드지 등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국내 패션 기업인 신성통상은 지난 7월 자발적 상장폐지를 위해 지분 공개매수에 나섰지만, 필요한 지분율을 채우지 못했다.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 규정에 따르면 최대 주주 등은 자진 상장폐지 신청 시점에 95% 이상의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신성통상이 확보한 주식은 83.9%에 그쳤다.
올해 상반기 상장폐지를 위해 공개매수에 나선 기업은 7곳이었다. 지난해 4곳, 2022년에는 2곳에서 상장폐지 목적의 공개매수가 진행된 점을 고려하면 대폭 늘어난 셈이다. 특히 실적이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기업이 대부분이어서, 보다 수월하게 자산을 매각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은 원활한 자금조달 등의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여러 의무도 부담해야 한다. 사업 현황 등에 대해 투자자에게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 대주주와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요주주의 변동 현황은 물론, 다른 회사를 인수·합병(M&A)하거나 보유 자산을 팔 때도 공시해야 한다. 이는 빠른 의사결정을 하려는 기업에게는 부담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마트도 이같이 판단해 최근 자회사인 신세계건설의 상장폐지를 추진 중이다. 신세계건설은 건설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지난해 1878억원의 영업 손실을 낸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643억원의 적자가 발생했다. 신세계건설은 주요 안건과 관련한 주주총회 의결 등 상장사의 의무가 사라지게 되면 사업재편과 경영 정상화에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적대적 M&A에 노출될 위험도 있다. 경영권에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기업 실적에 걸맞게 주가 부양책도 내놔야 한다. 최근 정부는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등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배당 등 투자자 관리에 소홀할 경우 정부 눈 밖에 나기 쉽다. 결국 대규모 자금조달 등 상장사로서 누리는 이익이 공시 의무 등 비용보다 작다고 판단할 때 상장폐지를 추진한다.
최근 잇따른 사모펀드 주도의 상장폐지 배경에는 투자금 회수라는 의도도 깔려있다. 실제 락앤락(어피너티), 쌍용C&E(한앤컴퍼니), 제이시스메디칼(아키메드), 커넥트웨이브(MBK파트너스) 등은 실적이 좋은데도 잇따라 상장폐지에 나섰다. 사모펀드 입장에선 지분 투자를 한 기업이 상장폐지시 기업을 재매각하기에 쉬워 투자금 회수에 유리하다. 또 상장폐지를 추진하는 기업 자체가 투자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상장폐지는 주로 주가가 하락한 시기에 집중될 수 있는 투자 방식”이라며 “투자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사모펀드의 성격 상 기업가치 제고 가능성이 높은 상장사의 주가 하락은 좋은 투자기회”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낮은 공개 매수가를 제시할 경우 투자자의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신성통상이 상장폐지에 실패한 데도 이같은 요인이 작용했다. 신성통상이 제시한 공개 매수가는 주당 2300원으로 주당 순자산(3136원)보다 낮았다. 주당 순자산이란 회사의 총자산에서 부채를 제외한 기업의 실질적인 재산을 발행 주식 수로 나눈 지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주당순이익이 만원이라면 기업 청산 시 주당 주주들에게 만원을 되돌려줄 수 있다. 프리미엄은커녕 기업 청산 시 돌려줄 수 있는 금액보다 적은 만큼 주주들이 반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신성통상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한 반사효과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기념 ‘평창 롱패딩’이 인기를 얻으면서 한때 주가가 4000원대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매출액은 1조5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동안 신성통상이 배당에 인색했던 점도 공개 매수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투자자들은 이번 상장폐지 목적이 수천억원 쌓인 이익잉여금을 총수 일기가 독차지하려는 것 아니냐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2세에 대한 승계 구도가 완성된 점도 이같은 의구심에 힘을 실어줬다. 염태순 회장 외아들인 염상원씨는 가나안 지분 82.4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가나안이 신성통상의 최대 주주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염상원씨가 신성통상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공개매수가가 적정한 지 판단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투자자는 공개매수가의 비교 대상으로 공개매수신고서 직전 종가, 직전 3개월 동안의 가격 등 제한적인 정보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대상회사의 향후 계획과 공개매수가의 적정성에 대한 정보 공시를 확대하는 것이 일반주주의 긍정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