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기술계에서 ‘버즈워드(buzzword)’는 벌처럼 윙윙거리며 유행하는 키워드다. 유행에 편승해야 연구과제를 따내기 쉽다. 친환경, 창조경제, 전 국민 코딩교육, 4차산업혁명 등 한국 과학기술 정책을 관통해온 화려한 버즈워드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한때 국가 자원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가, 이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과거가 됐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국제공동연구, 반도체라는 새로운 버즈워드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대개 세계적 기술 발전 추세를 반영하는 버즈워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말의 힘이 초래할 수 있는 역기능이다. 각 과학기술 분야에 적절히 배분돼야 할 자원이 하나의 유행어로 재단되면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한다. 전문성이 부족한 상당수 관료들은 실적을 위해 유행에 편승한 정책을 내놓고, 연구자들도 자발적이든 방조적이든 동조한다. 그 결과는 비효율과 예산 낭비다.
쌍방향 언어번역기가 나오고, 생성형 AI가 초보적인 코딩 작업을 처리하는 시대다.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와 코딩을 가르쳐야 미래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전문가와 관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AI가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larity)’이 도래했다며 과학기술 정책과 예산을 AI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현 상황도, 몇 년 후 돌아보면 과거의 성급한 주장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최근의 AI 투자 열풍은 ‘인공지능 군비경쟁’이라 불릴 만큼 화려한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그 미래를 구현할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의 건설 속도는 훨씬 느리고, 투자 위험은 커지고 있다. 반도체 제조 장비와 소재의 수급 총량,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가동할 전력까지 고려하면, AI의 미래는 과열된 투자가 아니라 반도체 수급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반도체 수급 병목을 국가 전략적으로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AI라는 버즈워드가 이런 허점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조선 건국과 함께 설립된 사간원(司諫院)은 절대왕권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견제 장치였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아무래도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탓에 버즈워드를 앞세운 전문가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이미 추진 중이거나 추진하려는 정책의 효율성을 점검하고, 유행 때문에 정작 필요한 정책이 밀려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기능이 필요하다. 과학기술계의 사간원 같은 레드팀이 있어야 버즈워드 남용으로 생길 수 있는 일방적 쏠림의 비효율을 줄일 수 있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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