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첫 잠수함, 장보고함 아니었다? 82년전 '씁쓸한 역사' [Focus 인사이드]

2025-11-20

지난 10월 말 경주에서 열린 2025년 APEC 회의는 보기 드물게 많은 얘기를 남겼다. 먼저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이 가장 주목받았다. 양국이 단순 무역 전쟁을 넘어 세계 패권을 놓고 한 치의 양보 없이 기 싸움 중이었기에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다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것처럼 성과물은 그저 그랬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히려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 출범 후 최초였던 중·일 정상회담의 여파가 컸다. 마치 보기 싫은 이를 억지로 마주한 것처럼 냉랭하다 못해 이후 여러 앙금과 외교적 충돌이 이어지면서 현재까지도 강대강 대립 중이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역린이라 할 수 있는 대만 문제를 이슈화했기에 2017년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이후 경색된 한·중관계보다 더욱 강도가 크고 여파가 오래갈 것으로 예상할 정도다.

개최국인 우리나라도 여러 외교 이슈의 주인공이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11년 만에 방한했을 만큼 오랫동안 한·중관계가 소원했으나 예상과 달리 우호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다카이치 총리 집권 후 양국 정부가 상대국에 대한 감정이 서로 상극이어서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던 한·일관계도 형식상으로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국내 시선은 한·미 정상회담에 쏠렸다.

미국이라는 시장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에 한창 밀고 당기던 관세 협상이 어떻게 매조질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모두가 아는 대로 타결됐는데 과연 이후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 두고 봐야 할 듯하다. 다만 이는 세계적 관심사는 아니었다. 현재 모든 나라가 미국과 관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즉 내 코가 석 자여서 다른 나라의 협상에 신경을 쓸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뉴스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정식 외교 또는 안보 관련 문서에 서명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핵추진잠수함(SSN) 보유 요구를 미국이 동의한 것이다. 우리는 국내에서 건조하고 연료만 공급받기를 원한다고 했던 반면 미국은 자국 내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고 얘기한 것처럼, 배치가 실현되려면 앞으로 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 명약관화해 보인다.

그런데도 주변국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만큼 엄청난 이슈임에 틀림없다. 여담으로 2005년 국내의 3대 군사 커뮤니티 공동으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인 리언 러포트를 초청한 토론회가 열린 적 있었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인물을 상대로 한 간담회여서 많은 관심 속에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이때 한 참석자가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보유에 대한 사령관의 생각이 어떤지 물어봤다.

그런데 통역이 군사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는지 이를 전략핵잠수함(SSBN) 뉘앙스로 오역해 러포트가 기겁하며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답했었다. 설령 핵추진잠수함이라도 주한미군 사령관이라는 공인의 입장에서는 의견을 내기 곤란한 주제였다. 그 정도로 민감한 부분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오늘날 정상회담에서 공론화하고 긍정적인 협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가히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국내 건조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한국의 조선 산업이 세계 최정상이나 원자로의 개발과 탑재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관계자들은 자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는 지난 30여 년 간 장보고급에서 시작해 손원일급, 도산 안창호급, 장영실급으로 이어지고 있는 풍부한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캐나다·폴란드 잠수함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 정도로 기술력을 축적해 왔다.

1993년부터 순차 취역해 한국 해군의 잠수함 역사를 개막한 장보고급은 독일에서 초도함을 직도입한 뒤 나머지 8척은 국내에서 조립 건조했는데, 개발자인 독일 HDW이 기술 이전에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게 어려움을 극복하며 기술을 하나하나 축적해 나간 결과 2021년에 이르러 마침내 독자 설계한 3000t급 SS-083 도산안창호함을 전력화했다. 그리고 어느덧 핵추진잠수함의 획득까지 바라보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만 배수량 1000t이 넘는 함을 기준으로 해서 그럴 뿐이지, 그 이하 규모 잠수정의 운용과 국산화는 좀 더 오래됐다. 1970년대 수량 미상의 배수량 70t의 SX-506형, SX-756형 잠수정을 이탈리아에서 도입했고, 1980년대 배수량 200t의 돌고래급 잠수정을 국내에서 개발 건조했다. 이들은 전투용이 아니라 특수작전용이어서 오랫동안 존재 및 운용 자체가 엄중한 비밀이었다.

아쉽지만 이는 비대칭 수중 전력을 해군의 중추로 삼아 1960년대부터 잠수함 부대를 운용하고 1970년대 면허생산과 자체 제작을 병행한 북한에 비하면 늦은 행보였다. 현재 북한의 잠수함 전력이 구식으로 평가돼도 수량이 많은 데다 무장공비 침투사건, 천안함 피격사건에서 보듯이 여전히 위험한 존재다. 거기에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최근 전략핵잠수함까지 건조 시도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오래전 한반도에서 잠수함이 만들어졌다. 비록 우리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1940년대 인천에서 일본 육군의 ‘3식수송잠항정(三式輸送潛航艇) 마루유(まるゆ)’가 건조됐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시간이 흐르자 점령지 각지에 고립된 일본 육군은 제때 보급받지 못해 고통을 겪었다. 1943년이 되자 수송을 담당하던 일본 해군도 안위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러자 다급한 일본 육군은 보급용 잠수함을 자체 운용하겠다는 기상천외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모든 조선소는 해군 물량을 만들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이에 육상에서 선체를 나눠 제작한 뒤 바닷가로 옮겨 조립하기로 하고 1943년 10월 도쿄 인근 안도철공소(安藤鐵工所)에서 초도함을 건조해 시험에 들어갔다. 결과에 만족하자 일본 육군은 400척 보유를 목표로 1944년 1월부터 양산에 나섰다.

물량을 조속히 확보하기 위해 인천의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조선기계)도 생산처로 지정됐다. 1946년 말까지 1차분으로 히타치에 24척, 닛폰 제강에 9척, 안도철공소에 2척, 그리고 조선기계에 3척(3001급)이 발주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3척의 마루유와 수송선으로 구성된 선단이 1944년 5월 23일 필리핀으로 출발했다. 도중에 공격을 받았음에도 3척의 마루유는 50여 일의 항해 끝에 마닐라에 입항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보급한 물자는 필리핀 주둔군이 4~5시간이면 소모해 버릴 100여 t에 불과했다. 그렇게 많은 마루유는 무의미한 작전을 펼치다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일본에서는 ‘최후의 감투 정신’ 운운하는데, 한마디로 쓸데없는 헛발질이었다. 더구나 한반도에서 많은 자재를 조달했기에 이 땅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잠수함은 그저 그런 흥밋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수탈의 역사로 남았다.

참고로 조선기계는 해방 이후 한국기계, 현대양행, 대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를 거쳐 현재 HD현대의 계열사인 HD현대인프라코어로 주인이 바뀌어 계속 같은 사업장에서 가동 중이다. 그런데 HD현대의 모태가 현대중공업이다. 국내에서 핵추진잠수함을 만들 가능성도 있는 회사가 한반도에서 처음 잠수정을 만든 곳에서 기업을 운영 중이라는 점은 흥미로운 인연이라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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