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은 길 위의 자연과 건축을 만나는 일이다. 아름다운 숲에서 꽃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가듯 근사한 건축물에서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보면 어떨까. 역사와 예술과 사람을 품은 건축을 만나면 여행이 더욱 풍성해진다.

건축을 테마로 한 첫번째 여행지는 덕수궁이다. 덕수궁은 서울의 궁궐 중에서도 전통 목조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어우러진 이색적인 곳이다. 특히 서양식 궁전인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은 화려한 내부를 둘러보며 파란만장한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를 만날 수 있어 가볼 만하다.
덕수궁을 둘러싼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나온다. 대한문으로 들어가 5분쯤 걸었을까. 고풍스러운 한옥 사이로 그리스 신전을 닮은 석조전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 기둥들이 줄지어 선 이국적인 건물 앞에는 유럽풍 정원이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해 1910년에 완공된 석조전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로 꼽힌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나선형 머리 장식이 있는 이오니아식 기둥과 삼각형의 박공지붕이 특징이다. 석조전의 박공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이화문(오얏꽃무늬)이 새겨져 있다. 적벽돌을 쌓아 화강암으로 마감한 건물의 규모는 너비가 정면 54m, 측면 31m에 이른다.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조성된 석조전 내부는 해설 프로그램을 미리 신청하면 관람할 수 있다. 해설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니 낯선 공기가 훅 밀려든다. 금빛 테를 두른 하얀 벽과 천장, 자주색 커튼과 화려한 샹들리에.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실내는 시간을 100여년 전으로 돌려놓는다.
집무를 보는 편전과 침실이 있는 침전이 분리된 전통 궁궐과 달리, 석조전에는 두 공간이 함께 있다. 집무 공간인 1층에는 중앙홀과 접견실·귀빈대기실·대식당이 있다. 접견실은 황제를 폐현(알현)하는 곳으로, 벽과 커튼에 장식된 이화문이 눈길을 끈다.
“석조전에는 133점의 가구가 있는데, 이중 41점이 준공 당시에 쓰던 겁니다. 영국 왕실에 가구를 공급하던 메이플사 제품이에요. 계단의 난간도 아름답죠? 유일하게 만져도 되는 유물이니 만져보세요.”
해설사의 설명을 따라 난간의 정교한 조각을 만져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생활 공간인 2층엔 황금색으로 꾸며진 황제의 침실과 서재, 자주색으로 치장된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이어진다. 원래 고종과 후궁인 순헌황귀비를 위한 공간이었으나, 고종이 거주하지 않고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의민황태자) 부부가 귀국했을 때 사용했다.

석조전의 역사를 듣다보면 건물의 운명은 집주인을 따라간다는 말이 떠오른다. 석조전은 1897년 고종이 황제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사용하면서 정전으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자주적 근대국가를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와 함께 서양 건축 양식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1910년 완공 직후 이뤄진 한일 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석조전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석조전은 미술관, 박물관,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등으로 활용되다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2층 복도에 걸린 석조전의 과거 사진들을 보며 테라스로 향했다. 안과 밖이 함께 보이는 테라스에 서자, 문득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며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오니아식 기둥 사이로 보이는 바로크식 정원과 한옥 전각, 그리고 궁을 둘러싼 빌딩들. 조선시대와 근대, 현대의 건물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100여년 전 그들은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기둥 사이로 무엇을 보았을까.
해설이 끝난 뒤, 덕수궁에 있는 또 다른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과 정관헌을 찾았다. 마침 이곳에서는 ‘대한제국 황궁에 선 양관(洋館)’ 전시가 7월13일까지 열린다. 신록이 무르익은 봄날,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담장 너머 낯선 시간 속으로 슬며시 들어가봐도 좋겠다.
김봉아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