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보다 죽음이 쉬웠던 테러리스트

2025-09-04

테러리스트의 수기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 정보라 옮김

빛소굴 | 586쪽 | 1만7000원

보리스 사빈코프는 1879년 러시아제국 남서부의 도시 하리코프에서 태어났다. 무엇이 그를 테러리스트로 자라게 했을까. 그의 삶엔 그가 마주한 시대적 상황이 녹아있다. 그의 아버지는 군사법원 판사였는데, 진보적인 정치 성향 때문에 해고당한 뒤 말년은 정신병원에 갇혀 보냈다. 그의 막냇동생은 소련 정권에 저항하다 총살당했다. 그의 아들 역시 소련에서 정치 사건에 연루돼 34세에 총살당했다.

사빈코프는 노동운동을 하다 체포돼 볼로그다에 유배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도망쳐 스위스로 탈출하고, 그곳에서 사회혁명당에 가입해 본격적인 투쟁활동에 나선다. 재무장관 플레베, 모스크바 총독이자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삼촌이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등 주요 인물 암살 작전 이야기가 책에 실려 있다.

폭탄 소리가 들리고, 성공 여부를 모른 채 나누는 대화 등 테러의 전말이 세세하게 기록돼있다. 사빈코프는 동지들과 거사를 준비하고, 때론 실패하고, 재정비하고,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함께 투쟁하며 의지했던 동지가 밀고자임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은 발생한 일을 단순 나열한 회고록이 아니다. 정치적 신념과 도덕적 양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내면을 섬세하게 담았다. ‘살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살인을 두려워’하고, ‘죽이기보다는 죽는 쪽이 쉬웠’던 당대 테러리스트들의 고뇌가 절제된 문체로 표현돼있다.

사빈코프는 혁명가이자 작가였다. 프랑스 파리로 망명해 이 책을 완성하고 소설 <창백한 말> 등을 펴낸다. 그는 소설에서도 테러의 윤리적 당위성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을 그렸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와서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정권에 저항했다. 이후 그는 소련 정부의 비밀작전에 속아 결국 체포되고,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수감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게 그의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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