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로에베는 예술로 물들었다. 독일 예술가 부부로 20세기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요제프&아니 알베르스(Josef&Anni Albers)와 조우한 컬렉션부터 까사 로에베 서울에서 열리는 프리즈 서울 특별전까지 패션과 아트의 경계를 넘나든다.

패션과 문화의 연결고리
로에베에게 예술이란 영감을 넘어 브랜드를 지탱하는 축이다. 1846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가죽 공방에서 태동한 로에베는 장인정신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했다. 로에베 가문의 4대손인 엔리케 로에베가 1988년 민간 문화재단으로 설립한 로에베 재단은 예술을 향한 브랜드의 진심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재단은 교육 프로그램과 더불어 공예·디자인·사진·시·무용 분야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공로로 2002년에는 스페인 정부에서 수여하는 미술공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현재는 엔리케의 딸 쉴라 로에베가 재단을 운영한다.

2016년 설립된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공예의 새로움과 우수성, 예술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연례 국제상이다. 매년 현대 공예 발전에 기여한 작가들을 최종 후보로 선정하는데 그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당대 최고의 공예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2022년 정다혜 작가가 말총 공예 작품인 ‘성실의 시간’으로 한국 예술가 최초로 대상을 받아 화제가 됐다. 오랜 시간 여러 분야의 창작을 후원한 로에베 재단의 헌신은 패션과 문화의 필수불가결한 연결고리를 드러낸다. 이런 접근 방식은 요제프&아니 알베르스 재단과의 협업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모더니즘의 선구자와 로에베의 조우
알베르스 부부는 20세기 영향력 있는 예술가였다. 요제프 알베르스는 독일 태생 예술가로 미국에서 미술 교육자이자 작가로 명성을 날렸다. 1922년,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아니 알베르스를 만났다. 이후 부부가 된 이들은 1933년 나치의 억압을 피해 도미했다. 요제프는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회화를, 예일대학교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며 많은 후배 예술가를 양성했다. 동시에 자신만의 그래픽 디자인 연구와 추상 회화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62세 때 색채 인식과 공간적 관계를 연구한 ‘정사각형에 바치는 경의(Homage to the Square)’ 연작을 시작해 타계 전까지 3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여러 색의 사각형을 겹쳐놓은 추상화는 색채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실험적 작업이다.


요제프와 아니는 인생과 예술 세계의 동반자로 서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둘의 작업 형태는 사뭇 다른데 그 차이가 오히려 흥미롭다. 요제프가 이성과 철학을 기반으로 기하학적 화면을 구축했다면, 아니의 작품은 시간 집약적인 노동과 창의성을 겸비한 수작업의 예술이다. 여기에는 이들이 살던 시대상도 영향을 미쳤다. 당대 예술계는 섬유 예술을 가사 노동과 결부해 현대미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는 씨실과 날실이 엮이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색과 질감의 향연에 집중하며, 아메리카 개척 이전인 ‘전 콜럼버스 시대’의 직물과 오래전 잊힌 기법들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섬유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섬유 예술이 다른 시각 예술과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바쳤다.

작품의 탄생
두 예술가의 작품과 열정은 이번 시즌 컬렉션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요제프의 중첩된 정사각형과 색면의 리듬은 퍼즐백·플라멩코 클러치·아마조나 백 등 로에베의 대표 가방들에 구조적인 활기를 불어넣었다. 아니의 대표작인 ‘점으로 된(Dotted)’, ‘오픈 레터(Open Letter)’ 등 직물 작품과 샘플들도 새롭게 재해석됐다. 로에베는 섬유 작품의 특성을 살려, 색색의 실을 직조하고 손으로 엮는 과정을 구현한 직물을 코트와 시그니처 백에 적용했다. 과히 ‘들고, 입는 예술’이라 부를 만하다.

지난 3월, 18세기 지어진 파리의 오뗄 드 메종에서 열린 로에베의 가을·겨울 컬렉션 프리젠테이션은 두 예술가의 작품을 오마주한 아이템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적 영감을 한데 모은 ‘스크랩북’ 같았다. 과거와 현재의 미감이 뒤섞이고, 여성복과 남성복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요제프와 아니 작품의 대비처럼 구조적인 디자인과 부드러운 실루엣이 조화를 이루고, 익숙한 의류들이 새롭게 조합되어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거듭났다.
프리즈 위크에 만나는 로에베의 전시
로에베는 프리즈 서울 개최를 맞아 서울 청담동 ‘까사 로에베 서울’에서 특별한 전시를 준비했다. 2023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후보자로 선정된 이인진 작가의 전시 ‘Collecting&Pilling(집적)’이다.

이번 전시는 프리즈 서울의 공식 프로그램 중 하나로 로에베가 발견한 공예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장작가마 소성을 통해 시간과 노동이 축적된 작품을 선보이는 이인진 작가는 직접 큐레이션한 작품 약 20여 점을 선보인다.
집념이 빚어낸 흔적
작가는 지난 49년간 흙을 빚어온 세계적인 도예가다.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서 살며 물레 성형을 접했고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동아시아 전통 도예 기술을 심도 있게 연마했다. 유약 없이 구워내는 전통 기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서 2년간 비젠 도자기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모교인 홍익대학교에서 31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고, 현재는 단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작업을 향한 그의 장인정신은 뚝심에 가깝다. 전기 가마를 사용하는 요즘 추세와 달리, 고된 작업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 장작 가마 소성법을 고집한다. 도기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내는 ‘무유소성 기법’은 장작 가마에서 가능한 기술로 불, 나무, 재가 어우러져 도자 표면에 자연스러운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 역시 작품의 일부가 된다. 물레 성형으로 빚어낸 항아리와 그릇은 소박함과 부피감을 드러내며 작가만의 정교한 시선을 전한다.

전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는 오랜 시간 ‘축적과 반복’을 조각적 전략으로 삼아왔다. 그 배경에는 일상에서 마주한 발견이 있다.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물건들, 가게 앞 상자 더미, 층층이 쌓인 탑, 가지런히 놓인 장작 등 ‘쌓인’ 형태와 구조에서 느낄 수 있는 존재감에 주목했다. 바구니 형태로 제작한 철제 구조물 속 켜켜이 쌓은 도자 작품이나 탑처럼 쌓인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과 무게감을 전한다. 작가는 이를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를 쌓아 올리며 새로운 조형을 발견하는 실험’이라며 일상 속 예술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번 전시는 프리즈 서울 기간을 포함해 9월 4일부터 14일까지 이어지며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본 행사에 앞서 3일에는 작가와 함께하는 두 차례의 프라이빗 아트 토크가 열린다.
“나의 작업은 흙장난, 불장난의 최고 경지다”
-이인진 작가 인터뷰

전시를 통해 어떤 조형미를 보여주고자 하는가.
"기존 공간과의 조화로움. 여러 층에 걸쳐 작품이 놓이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고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20여 년간 ‘집적’을 주제로 작품을 선보여왔다.
"쌓는 행위는 또 다른 형태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작품이 서로 얹혀지기도 하지만 철제 바구니 속 층층이 쌓이기도 한다. 그 안에 작게는 120점, 많게는 200점까지 들어간다. 겉에서 보면 거대한 오브제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각의 존재감과 어울림을 찾을 수 있다.
작업 과정은.
"물레를 돌려 흙을 빚고, 한 번에 짧게는 5일, 길게는 8일 이상 가마를 뗀다. 유약을 바르지 않는 기법이라 오래 걸리는 건데, 계속 지켜보면서 기물의 색이나 질감의 변화를 살핀다.

이런 과정이 힘들지 않은가.
"일단 노동을 좋아한다. 그리고 전기 가마와 장작 가마의 차이는 기물이 나왔을 때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한 번 그 맛을 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거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런 차이와 깊이를 알아봐 주고 요구하는 시대가 됐다고 생각한다."
본연의 미감 말인가.
"이건 불장난과 흙장난의 최고 경지다. 그 매력에 작업 자체를 즐긴다."
그릇이나 주전자, 찻잔을 보면 도예는 일상과 가장 맞닿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핵심은 쓰임이다. 나는 조형 작업도 많이 하지만, 결국 내 작업에 어떤 쓰임이 담기길 원한다. 지금도 끊임없이 기물을 만든다. 매번 똑같을 것 같지만, 늘 새로운 쓰임을 연구한다. 비싼 컵이 아니라 정신이 깃든 컵을 곁에 두고 즐기는 인생이 ‘멋 나는’ 삶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장인정신은.
"전통을 고스란히 잇는다기보다는 선조들이 남겨준 아름다운 유산을 잘 느끼고, 내 시대의 언어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 전 세계에서 한국 도예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열심히 한 것들을 후배들에게 잘 넘겨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