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트업이 새 정부에 진짜 원하는 것 ④] “규제 샌드박스, ‘유예’는 문제 해결법이 아니예요”
[바이라인네트워크x코딧 공동 기획] 스타트업은 어떤 정책을 필요로 할까요? 21대 대선을 앞두고, 스타트업이 새 정부에 진짜 원하는 정책을 총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제 막 성장하는 스타트업들이 어떤 정책을 바라고 있는지 취재했습니다. 새로 탄생하는 정부가 앞으로 이 이슈에 관심을 갖고, 더 나은 정책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 기사는 정책 연구 스타트업 코딧과 바이라인네트워크가 함께 합니다.
① 클라우드 장벽에서 꺼내주세요
② “글로벌 팁스 받으려면 글로벌 투자 받아오라고?”
③ “스타트업도 고액 연봉자 뽑게 지원해주세요”
④ “규제 샌드박스, ‘유예’는 문제 해결법이 아니예요”
할 수 있는 사업만 법이 정해주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하면 안 되는 것만 법이 정해주고 나머지는 개인, 혹은 기업이 자유롭게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나을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후자가 유리하다. 그러나 우리 법은 그렇지 못하다. 할 수 있는 것만 법이 정해주는 방식을 ‘포지티브 규제’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 방식을 택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는 많은 스타트업이 규제의 벽에 부딪혀 제대로 혁신을 시도해보지 못한다.
답답하다, 길을 열어 달라는 지적이 지속되자 지난 2019년 ‘규제 샌드박스’라는 제도가 시작됐다. 법으로는 막혀 있지만,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라고 시험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정부는 이 제도에 대해 ‘신산업 규제 혁신의 대표 플랫폼’이라 치켜세우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스타트업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 있지 않는 것이 규제 샌드박스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먼저 규제 샌드박스를 시행하는 주체가 모두 다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등 6개 부처가 규제 샌드박스를 운영한다. 각자 관여하는 법이나 규제가 달러서다. 사공이 많다 보니 담당 기관별로 별도의 업무 프로세스를 따르고 있다. 통합적인 관리체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관련 데이터 축적이 어렵다. 법이 개정된다고 해도 부처 별로 상관 있는 개별 법이 달라 서로 부딪히는 경우도 생긴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4월, 국무조정실이 규제개혁위원회를 열고 규제샌드박스 운영의 표준지침을 의결했다. 규제 샌드박스 신청에서 승인, 사후 관리, 법령 정비와 관련해 각 부처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이다. 국무조정실 규제혁신기획관실은 “기존 법령이나 각 샌드박스에 관한 법률에 이미 들어가 있던 내용을 구체화한 것”이라며 “가이드라인으로 그간 (법령의) 공백이 있거나, 부처마다 다르게 운영되어 왔던 데서 오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이 내려왔다고 해서 현장의 문제가 모두 풀리는 것은 아니다. 지침이 현장에서 적용될 때,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고 그럴 때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어야 반복되는 문제가 줄어들 수 있다. 이 제도에 직접 참여하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정지은 코딧 대표는 “부처들끼리만 규제 샌드박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실제 담당 기업이나 스타트업 관련 협회도 논의에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 대표는 또 “폴리시 액셀러레이터(Policy Accelerator, 혁신적인 정책 아이디어가 빠르게 실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직, 또는 프로그램)처럼 규제 해소에 있어 스타트업이 직접 감시하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규제 샌드박스는 일정 틀 내에서 자유롭게 해보라는 취지인데, 현재는 자유의 범위가 매우 협소하다. 현행 실증특례는 사업과정에서 실증 범위를 조정하지 못하고, 사실상 사업성과를 낼 수 없는 부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시장에서 실질적 성과를 내야 하는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제한된 시범사업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하거나 투자를 유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지은 대표는 “규제 샌드박스가 스타트업엔 그저 ‘희망고문’에 불과하게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업계에서 들었다”면서 “정부 책임하에 빠르게 실증을 하고 안정성이 확인되면 곧바로 규제를 풀어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 규제 샌드박스 집행 과정에 대한 아카이빙도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주문도 한다.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 규제 샌드박스의 부족한 부분을 바꾸자고 해도, 과거에 문제가 뭐였는지 알기 어려우면 제대로 고칠 수 없다. 또, 각 부처나 스타트업이 규제 개선을 요청했던 케이스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
R&D와 연결된 실험 환경으로서의 샌드박스 필요성도 지적되는 부분이다. 정지은 대표는 “임시 놀이터로서의 샌드박스가 아니라, 다양하게 기술을 시도해볼 수 있는 진짜 샌드박스가 있어야 우수 인재가 R&D를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다”면서 “제도적 제약, 현재와 같은 불확실성 속에선 좋은 인재도 도전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 규제 샌드박스에서 태어난 ‘퍼스트 펭귄’
앞선 문제들은 자연스레 퍼스트펭귄이 겪는 어려움과도 연결된다. 퍼스트펭귄은 맨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존재를 일컫는다. 남들이 하지 않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기술을 가지고 도전하는 스타트업도 퍼스트펭귄이라 부른다.
문제는 이 퍼스트펭귄이 규제 샌드박스 안에서 실증 결과를 냈고, 이를 토대로 규제 개선이 이뤄졌을 때도 일어난다. 실증 특례는 아직 법으로 막혀 있는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를 한정적인 제약 아래서 실험해 볼 수 있게 한 것이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업 범위에 제약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성과를 내고, 그 결과 규제가 풀어지게 되면 자본이나 인력을 확보한 후발주자들에 퍼스트펭귄이 뒤처지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는 것.
제주도 빈집 재생 스타트업 ‘다자요’도 퍼스트펭귄의 사례다. 빈집 재생은 농어촌진흥법에 의거, 규제에 막혀 있던 영역이다. 다자요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1년 중 300일만 영업, 50채 한정’이라는 제약을 갖고 제주도 빈집을 활용한 숙박 사업을 지속했다. 문제는, “영업일수도 적고, 50채를 넘겨 사업을 확장할 수도 없는 사업”에 투자자들이 돈을 넣기 꺼려했다는 거다. 다자요는 결국, 실증특례 기간에 자본잠식에 처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2024년 1월에 특례 기간이 연장되면서 영업일수 300일 제한은 폐지됐으나, 여전히 한계는 존재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정부부처가 빈집 재생을 적극 장려하는 것으로 태도가 바뀌었다. 지난 5월 정부가 ‘범정부 빈집 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실증특례에 참여하지 않은 기업도 빈집 재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연 것. 규제가 풀리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간 어려움을 겪으면서 먼저 사업을 시도해 온 기업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향후 또 다른 영역에서 퍼스트펭귄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지은 대표는 “퍼스트펭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규제 샌드박스 참여 기업들에 대한 사후지원 강화가 필요하다”면서 “벤처캐피털과의 연계, R&D 기술개발 과제와의 연계, 해외 진출 컨설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남성준 다자요 대표는 “우리나라는 통상 새로운 시도를 먼저 해본 적이 없고 주로 해외 사례만 가져오는데 빈집 재생은 기존과는 달리 우리가 제일 먼저 시도한 사례가 됐던 경우”라면서 “중앙부처를 대신해 (농어촌을 활성화시킬) 방안을 만들었으니 정부 입장에선 그만큼 비용이 줄어든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먼저 새로운 시도를 했던 기업과 함께 정부가 새로운 국가 사업을 진행하거나 보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