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해외 원조 동결이 초래한 부정적 여파가 세계 각지에서 불거지고 있다. 범죄 단속과 예방, 보건 등 시민 안전에 도움을 받아온 중진국·개발도상국이 예산 삭감과 사업 중단의 충격을 떠안는 중이다. 미국식 민주주의 확산에 앞장서 온 단체나 기구 지원도 줄줄이 삭감되면서 기능이 마비됐다. 자유주의 진영의 글로벌 리더를 자임해온 미국이 타이틀을 자진반납 하면서, 갑작스러운 공백을 맞게 된 국가들이 대응 마련에 분주해졌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돈줄에 기댈 게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갖출 기회라는 자강론도 불거진다.
워싱턴포스트(WP)는 16일(현지시간) 미국의 해외 원조 동결 이후 중남미 지역의 마약 퇴치 프로그램이 돌연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수혜국의 조직범죄나 인신매매 및 마약 거래 대응을 지원하는 국무부 산하 국제마약·법집행국(INL) 예산이 삭감된 영향이다.
콜롬비아 국방부는 WP에 국제 형사 수사 훈련 지원 프로그램(ICITAP)이 중단됐으며, 이외의 지원 사업도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마약 단속을 위해 700만달러(약 101억원) 규모의 부두 건설 계획을 세워둔 에콰도르는 사업을 보류한 상태다. 멕시코에서는 INL 사업에 고용된 인력의 절반가량(약 60명)이 해고됐으며, 항구에서 이뤄지는 마약류 펜타닐 검사 프로그램은 축소됐다고 한다.
범죄 단속 기법과 치안 시스템 운영 방안을 전수받아온 일부 국가는 지원 공백을 해소하려 대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엘리자베스 디킨슨 국제위기그룹(ICG) 수석 분석가는 “콜롬비아가 지정학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렸는지 의문을 품는 순간”이라며 “미국이 신뢰할 만한 파트너가 아니라면 콜롬비아는 대안을 찾아 나설 것”이라고 했다. WP가 인터뷰한 전직 보안 관계자는 콜롬비아가 치안 관련 자원의 약 70%를 미국 및 그 동맹국에 의존했다면서 지원 중단으로 “(콜롬비아가) 인도, 튀르키예나 중동 국가들과 새로운 기술·보안 파트너십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독재국가의 인권 탄압을 감시하거나 자유주의 체제 확산 활동을 벌여온 비정부기구(NGO)와 미디어도 예산 삭감의 직격탄을 맞았다. 83년 역사를 가진 연방정부 산하 언론사 ‘미국의소리’(VOA)는 기자·PD 등 1300여명 직원이 무기한 휴직에 들어가는 등 폐쇄 위기에 놓였다. VOA가 공화당에 비판적이며 민주당에 우호적이라고 불만을 드러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4일 지출 삭감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북한 인권 단체 등에 자금줄을 대온 민주주의진흥재단(NED)도 예산이 대거 삭감됐다. NED의 북한 인권 관련 예산 지원이 중단되면서 북한 인권 관련 활동을 이어온 NGO들이 해고, 사업 중단, 폐쇄에 직면했다. 맥스 부트 WP 칼럼니스트는 “VOA 지원 중단은 독재자들에게 도움이 될 뿐”이라며 “트럼프가 만든 공백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채울 것”이라 비판했다.
해외 원조 중단으로 ‘에이즈 구제를 위한 비상계획(PEPFAR)’이 멈춰선 아프리카는 직접적으로 보건 안전을 위협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 후, 기관 종사자가 해고되고 병원 폐쇄가 이어졌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 영향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향후 10년간 50만명 이상이 사망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유엔난민기구(UNHCR) 분담금의 40%를 담당하던 미국이 손을 끊으면서, 아프리카의 극심한 난민 문제도 향후 악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론도 있다. 치홈보리 콰오 전 주미 아프리카연합 대사는 이날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인도주의적 지원을 가장한 해외 원조는 수혜국 정부의 무능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이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자각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