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채운 클래식, 끝없는 울림의 세계 (1)

2025-11-26

어려서부터 혼자 사유하는 시간을 즐겼는지 음악, 독서, 영화, 악기, 글쓰기 같은 방면에 자연스럽게 끌렸는데 특히 음악을 섬세하게 느끼는 편이었다. 궁금한 정보는 책, 잡지, 신문 등을 찾아 되는 대로 기록하고 모았다. 작곡가, 지휘자, 연주자, 감독, 배우는 물론 문학 속 인물들까지 나만의 방식으로 탐구했고, 척박한 가세 속에서도 책과 음반을 손에 넣기 위해 스스로 애썼다. 성인이 돼 삶의 템포는 정신없이 빨라졌지만 정적인 취향은 은은하게 이어져 나의 세계는 또렷한 형상을 갖춰갔으며, 덕분에 사람들과의 물리적 거리가 극도로 멀어졌던 팬데믹 시기에 자신과는 더욱 가까워지는 전화위복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지면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눠보고자 한다.

초등학교 4학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1962년 녹음을 담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성음 라이선스 테이프가 생긴 것이 ‘클래식’이라는 서양 고전 음악과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었다. 작은 JVC 오디오로 67분짜리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 들었고, 무한한 감동의 ‘환희의 송가’ 선율이 4악장 한참 후 나온다는 점과 1~3악장의 존재는 아주 신기하게 다가왔다. 9번 교향곡에 문자 그대로 압도당한 후 이런 저런 음반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집 한구석에서 찾아낸 세계명곡해설대전집(진현서관, 1978) 7권은 음악 생활의 나침반과도 같아 학생 시절 그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한 클래식과의 인연은 이제 어느덧 40여 년에 이르고 있다. 그 감성을 일깨우는 데에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던, 지금은 나의 부친께서 작고하신 뒤 홀로 여러 병환과 힘겹게 투병 중이신 어머니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궁금한 음악과 연주를 듣기 위해 조금씩 음반을 모으다 보니 현재 자택 음악감상실과 치과에는 LP 3만여 장, CD 5만여 장, 블루레이 2천여 장, 그리고 그 음반들을 훌륭하게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오디오 장비들이 있다. 음반 많은 게 무슨 자랑이겠는가. 단지 원하는 음반을 언제든지 꺼내 들을 수 있다는 장점 정도가 생겼을 뿐이다.

본업은 교정의지만 클래식과 이룬 시간을 감상이란 취미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음악 칼럼니스트로서 음악 잡지에 신보 평을 기고해 왔고,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밤베르크 심포니 등 해외 유수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때는 프로그램 해설을 쓰기도 한다. 아마추어 지휘자로서 매해 모교 치과대학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고생하며 정기연주회 지휘도 이어가고 있고, 취향이 맞는 이들과 집을 오가며 음반을 듣는 소박한 즐거움도 놓치지 않는다. 지역 사회에서 작은 클래식 강의들을 진행함은 물론 몇몇 음악가들과의 교류도 계속하고 있다. 가족들과 전국 각지의 좋은 공연장을 찾아 음악회를 관람하고 오는 것 역시 큰 즐거움이다.

이렇게 살다 보니 주변에서 늘 받는 질문은 음악 감상을 위한 방법이다. 그 얘기를 조금 하자면, 첫째는 당연히 청음을 위한 기본적인 공간과 기기를 갖추는 것이다. PC 스피커나 이어폰, 폰으로는 음악의 섬세한 질감, 구조, 다이내믹, 음장감, 공간감 등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꼭 고가의 오디오를 마련할 필요는 없겠지만, 작더라도 정돈된 공간과 최소한의 재생 기기(소스 기기, 앰프, 스피커 등)를 갖춘다면 감상은 훨씬 풍성해진다.

둘째는 음반 한 장을 정해 그 곡을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 것이다. 다악장의 작품 하나가 부담된다면 한 악장만 선택해도 좋다. 해설서나 음반 내지를 통해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더욱 좋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선택했다면 작곡 시기와 배경, 작품 구조 등을 대충이라도 알고 듣는 것만으로도 감상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 폰을 멀리하고 계속 듣다 보면 특별히 좋아하는 부분도 생기고 감동도 따라온다.

셋째는 자연스러운 확장의 단계로 베토벤 5번에 익숙해졌다면 7번, 9번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혹은 똑같은 5번 교향곡이라도 카라얀의 연주가 좋았다면 카라얀의 다른 녹음도 듣고,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들어본다. 여러 번 듣다 보면 지휘자, 연주자, 오케스트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 연주의 개성이 들리며 음향, 템포, 다이내믹, 악보 해석의 차이 등도 느껴지기 시작한다. 본인은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만 해도 각각 100여 종 넘게 가지고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연주는 없다. 음반 감상의 진정한 즐거움은 비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공연장을 직접 찾아 감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무대의 긴장감, 연주장의 울림, 실연의 감동 등은 ‘오디오는 허상이다’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음반으로 대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익숙한 음악이 나온다면 감동의 증폭은 배가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감상은 단순히 듣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경험과 지식과 표현으로 확장될 수 있다.

클래식 작품들과 이를 담은 음반들이야말로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생각한다. 클래식은 수백 년간 이어온 ‘악보’라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품고 있으면서도, 연주(표현)와 감상(수용)을 통해 무한히 변주될 수 있는 예술이다. 그렇다고 오직 클래식 음악만이 고상한 취미라는 함정에 빠진 적은 없다. 다만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서도 본업 외에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진지한 무언가’, 특히 정서적, 사색적, 문화적 취미를 찾는다면 더욱 흥미롭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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