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시대에 예술가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되찾을까

2024-10-24

AI 시대의 미술 교육, 위기와 기회

미국 시카고 대학의 미술사가 제임스 엘킨스에 의하면 이 시대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눈물을 가르치는 데 실패했다. 그는 네덜란드 화가 디르크 바우츠(Dirck Bouts)가 1460년경에 그린 ‘울고 있는 마돈나’를 15주 동안 모작했던 한 미술대학 학생의 경험을 소개한다. 몰입의 시간을 거치면서 성모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학생의 마음에서도 흘러내렸다. 단지 감정이입 효과를 말하는 게 아니다. 형틀에 달린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도가 2000년의 세월을 관통해 현재적 사건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눈물이 마르고 인내심도 동난 예술교육의 현장에 또 하나의 위기가 몰려온다. 빠른 스크롤과 클릭에 갇혀 사람과의 관계, 사물의 경험이 단절되는 시대에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생각 자체를 밀어내는 위기다. 검색 엔진에서 단편적인 정보를 구하는 웹3.0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I)에 혜안과 대안을 구하는 시대의 위기다.

발상의 시간을 가성비 높은 AI에 의뢰

예술가들이 ‘발상(發想)’, 즉 생각을 떠올리는 단계를 AI의 탁월한 리믹스 능력에 위임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필요로 하고, 고통을 동반하고, 불확실성의 요인이 되는 발상의 시간을 프롬프트 작성을 통해 AI에 의뢰하는 것이다. 쉽고 가성비가 높은 길이다. 왜 마다하겠는가.

발상은 창작의 뇌관에 해당한다. 세계 관찰과 성찰이 이 단계에서 융합된다. 세계와 나, 영원과 순간 사이에서 삶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고도의 주의집중 시간이다. 자신과의 고독한 대면이다. 창작의 고뇌, 프랑스의 시몬느 베유(Simone Weil)가 ‘신(神)에게로 난 직항로’라 했던 노선이 가파르게 비좁아지는 것이다. 명상이나 기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현존하지 않는 세상이나 높은 수준을 현실로 초대하는 힘이다. 예술의 임무는 다른 현실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 힘의 여부에 의해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렘브란트 반 레인,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예술이라는 별도의 항목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생성형 AI 시대 예술의 모순은 데이터와 진중한 사색이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이미 2006년 시사 주간지 ‘타임’은 인터넷 콘텐트를 만드는 ‘You(너)’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예술을 포함한 공간들의 위기다. 예술가들도 가상주의자로의 전향을 요구받는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물질과 경험을 떠나지 않기를 고집하면서 완강히 버티더라도 점점 더 외로운 싸움이 될 것이다. 사회가 더 디지털화되고 AI가 꾸준히 정부와 상품시장에 투입되면 그 영향권을 벗어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인간 내부에서 진행되는 불길한 균열

생성형 AI가 예술창작의 산실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인간보다 디지털 도우미를 더 좋아하게 될 거라는 게 산업계의 전망만은 아니다. 예술가들도 AI의 이미지 생성 능력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높여가는 중이다. 예컨대 미드저니(Midjourney) 같은 생성형 AI의 도움을 일말의 거부감도 없이 수용한다. 효율성뿐 아니라 품질 측면에서도 프롬프팅으로 생성된 이미지가 자신이 애써 만든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주목해야 하는 변화다. 인간의 인식 내부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불길한 균열, 인간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사고자이자 행위자라는 인식에 나기 시작한 균열이다.

결과물은 더 논쟁적이다.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작품 ‘Unsupervised(감독 되지 않은)’에서 디지털 영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라. 이 영상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현대미술품 컬렉션 13만여 점을 AI를 통한 해석·변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2차원을 3차원으로 보이도록 하는, 넘실대는 듯한 ‘눈속임 효과’가 감상의 주된 포인트다. 시각효과는 극적이지만 그것이 다다. AI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냈다는 것을 제외하곤 어떤 새로움도 없다. 눈속임 효과는 르네상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루한 주제일 뿐이며 인식의 전환, 새로운 세계로의 안내, 감각의 고양이나 숭고한 정신과는 무관하다.

과정을 전적으로 주도하는 ‘AI 예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AI는 기계가 아니라는 점이 그것이다. AI는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유형의 ‘지능’이다. 이 지능은 단순한 번역이나 변환 과정이 아니다. ‘AI 예술’이라고? 하지만 이건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와는 다른 차원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과정은 전적으로 AI가 주도한다.

번역이든 이미지 변형이든 인간은 관여할 수 없다. 과정 전체를 기획한 아나돌 조차 이미지 생성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결과가 어떻게 도출될지 알 수 없다. 결과물이 실망스럽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이 비인간 지능이 막대한 전기를 포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예술은 사고의 진전에 기여해야

예술은 과정에 동원되는 기술이 무엇이든 사고의 진전에 기여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이제껏 해왔던 그 일을 지속하면서 더 나은 미래의 초석을 까는 것, 비록 비극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이라는 다짐을 되새기는 사고, 인간의 위대성의 산실이 되는 이 사고는 세 조건을 요구한다. 과거를 스승으로 삼을 것, 기원을 생각할 것, 현실의 절박함을 기억할 것. 이 세 가지가 바로 예술의 일이기도 하다고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말한다.

이 사고가 다음 세대 예술가들의 가슴에 자리하도록 해야 한다. 이 시대가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예술대학의 작업실을 뜨겁게 달궈야만 희망이 있다. AI의 열풍 속에서 인간을 황혼 속으로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창조적인 신념, 애써 만들어진 미덕, 많은 가능성과 미혹 앞에서 어질어질한 망설임을 내면에서 되살려내도록 하자. 수면에서 깨어나는 것, 부흥(revival)이라는 정신의 역동성이 다시 새롭게 일어서는 것, 지성의 신앙이 기지개를 켜고 새벽을 맞이하는 것이 젊은 세대의 꿈의 목록에서 앞부분을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

범용AI의 인간 대체 주장엔 거품 많아

AI와 예술의 앞날에 대해서 부산한 논의들이 이어진다. AI가 이미 인간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내고 있으며, 머지않아 범용 AI가 인간예술을 완전히 대체할 거라는 진단도 있다. 이에 따라 인간 예술가의 고전적인 자질들, 즉 해방의 열망과 도덕적 고뇌 따위는 이내 무용해질 거라는 괴담 수준의 우려와도 심심치 않게 마주한다. 하지만 그런 담론들에는 거품이 많이 섞여 있다.

희망을 버려야 할 이유는 없고, 그렇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방해 없이 역사를 만들지 않지만, 그런데도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다. 예술가들은 더 진화된 AI 기술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술혁신만으로는 자신의 개발자인 인간의 부조리를 초월할 수 없다는 깨달음과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선 인공지능이나 강인공지능(AGI)이 인간의 오류를 줄이는 쪽으로 진행될지 그 반대일지 불확실하다. AI가 역사를 어느 쪽으로 이끌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답해야 하는 주체는 변함없이 인간이다. AI는 예측하고, 결정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지만, 의식과 정신은 없다.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거나 결정에 대해 반추해야 할 궁극의 이유가 없다. 미래와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가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형벌이라 했던 것인 ‘정말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은 채 사는 것’에 대한 답을 내놓으라고 AI에게 촉구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시 뜨거워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차가워진 시대의 아궁이에 불을 지필 것인가. 이에 답하는 임무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예술가에게 주어지고 있다.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심상용 서울대 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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