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다면체에 응축된 전범국 독일의 우울

2024-10-24

안젤름 키퍼의 ‘멜랑콜리아’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누구일까? 많은 사람이 볼드모트를 떠올릴 것이다. 마법사들이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두려워서 ‘그 사람’, 혹은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자’라고 속삭이듯 칭하는 인물. 주인공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마법 세계를 혼란과 공포에 빠트린 메인 빌런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디멘터’라는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해리포터의 세계에서 디멘터는 감옥을 지키는 간수 역할을 할 뿐, 엄밀히 말하면 빌런도 아니고 딱히 사악한 면도 없다. 그럼에도 모두들 무서워한다. 디멘터는 인간의 희망과 행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책에서는 겉모습이 모호하게 묘사되는데, 그 존재는 누구나 바로 느낄 수 있다. 가까이 오기만 해도 갑자기 한기를 느끼며 슬프고 우울한 감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행복한 기억과 긍정적인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자기 비하와 절망감만 남는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가장 용감한 마법사 중 하나로 영화에서는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매력적인 인물 시리우스 블랙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가 바로 디멘터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경험했기 때문이다.

1945년생, 전후 독일 최대 작가

낭만주의 계승하며 과거사 비판

역사 외면 거부, 독일 점령지 찾아

나치식 경례 자신 찍는 사진 작업

독일의 다빈치, 뒤러 작품에 영감

‘멜랑콜리아’ 제목 회화·조각 작업

디멘터는 말하자면 우울증의 현신이다. 우울한 감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울증 때문에 자살 충동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해리포터의 저자 J. K. 롤링은 아는 것이다. 누구보다 세상과 예민하게 소통하는 예술가들에게도 우울은 친숙한 감정이다. 우울과 비슷한 단어로 ‘멜랑콜리’가 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검은 숲 들판에서 지루했던 유년

이 작품을 그린 안젤름 키퍼는 1945년생으로 전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하나로 꼽힌다. 슈바르츠발트(검은 숲)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풍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없는 시절, 화장실만한 방에서 삼 남매가 같이 지내야 했다. 밖으로 나가도 버려진 건물과 황량한 들판뿐이었던 어린 시절을 그는 지루함으로 가득한 광활한 빈 공간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독일은 패전국일 뿐만 아니라 전범 국가였다. 그가 미술대학에 입학해 예술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는 어떤 식으로든 ‘독일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때였다. 독일이 자랑하는 과거의 문화유산은 대체로 나치즘에서 인종주의의 근거로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괴테와 바그너, 니체와 그림 형제 모두 히틀러에 오염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전범국의 예술가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국제적 유행에 따라 추상미술이나 팝아트 스타일을 따르거나, 독일인의 정체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지극히 중립적인 소재를 다루는 것이 안전한 길이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기를 거부하고, 나치즘이라는 이 최악의 흑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키퍼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예술로써 돌파하기 위해 정면승부를 걸었다. 그가 미술대학 졸업반 과제로 만든 작품은 2차대전 때 독일이 점령했던 유럽의 다양한 도시에 가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키퍼가 유럽 각지의 숲과 언덕, 해변에서 촬영한 이 사진들이 공개되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가 나치즘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숭배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키퍼는 양식적으로는 독일 미술의 낭만주의와 표현주의를 계승하면서도 나치즘에 대한 비판과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에 대한 애도를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는 장엄하면서도 신비롭고,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세계로 독보적인 작가의 위치에 올랐다.

그렇다면 2004년 작인 ‘멜랑콜리아’는 무엇을 그린 것일까? 얼핏 보면 황량한 들판, 혹은 거친 바다를 연상시키는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늘에 해당하는 윗부분은 붉은 기가 도는 황토색, 반대로 땅 혹은 바다에 해당하는 아랫부분은 납빛을 띠는 회색이다. 불모의 땅, 오염된 바다가 떠오른다. 시간도 장소도 짐작할 수 없는 광활한 공간은 마치 재난 이후의 풍경을 그린 듯하다.

그림의 한가운데 유리로 만든 이상한 모양의 유리 상자가 철사로 매달려 있다. 키퍼는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의 회화와 조각을 여러 점 만들었는데, 이 제목이 붙은 작품에는 이 정체불명의 기하학적 도형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는 그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년)가 그린 동명의 작품 ‘멜랑콜리아’를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멜랑콜리는 예술 창조 모태

이쯤에서 ‘멜랑콜리’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존재한 이 단어는 서구 유럽의 역사 속에서 시대에 따라 뜻과 뉘앙스가 조금씩 변했는데, 단순하게는 우울한 기분에서 심하게는 망상과 환각을 동반하는 정신질환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런데 16, 17세기에는 이것이 예술가의 창조적 능력, 혹은 천재의 특성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뒤러의 동판화 ‘멜랑콜리아’이다.

팔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천사는 이 복합적인 의미의 멜랑콜리를 의인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대체로 창조를 위해 고뇌하는 천재로서의 예술가를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사다리와 모래시계 등 온갖 물건들이 그려진 이 그림은 수수께끼 투성이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뜬금없는 것은 화면 왼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상한 모양의 도형이다. 키퍼가 유리로 만든 상자가 바로 이 도형을 본뜬 것이다.

얼핏 보면 정육면체를 사선 방향으로 세운 후 위와 아래를 삼각뿔 모양으로 잘라낸 것처럼 보이는 이 특이한 도형은 ‘뒤러의 다면체’로도 불린다. 뒤러가 이 다면체를 왜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독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불리는 천재 화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형과 상징물로 가득한 그림을 그려놓고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았으니, 이 그림은 수많은 미술사가와 수학자들의 흥미를 끄는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다. 다면체의 각 꼭짓점들을 위에서 아래로 투사하면 다윗의 별(육각성)이 된다는 둥, 프리메이슨의 중요한 상징이라는 둥 온갖 가설들이 존재한다.

다시 키퍼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키퍼의 ‘멜랑콜리아’는 중앙의 유리 다면체를 제외하면 특별히 두드러지는 데가 없는 텅 빈 공간에 다름없다. 여기에 키퍼가 생각하는 우울에 대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광활한 폐허의 풍경 속에서 느낀 끝없는 지루함과 연결된다. 실제로 그는 비어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지루함 속에서만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그림에는 납이 재료로 쓰였는데, 키퍼는 납을 유난히 좋아했다. 납을 뜨겁게 녹여서 캔버스 위에 붓다가 화상을 입어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왜 그렇게 납을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납은 연금술의 재료이고 독성이 강해서 매력적”이라고 답했다. 어쩌면 키퍼는 자신을 연금술사라고, 그리고 우울은 일종의 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키퍼의 ‘멜랑콜리아’는 고독 속에서 느끼는 개인의 실존적 우울, 역사와 시대의 우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숙명적 우울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로도 증명된다.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국가에 태어난 예술가로서 어두운 과거를 끊임없이 대면하는 길을 선택한 키퍼의 숙명적 우울.

일본인 큐레이터의 질문

10여 년 전, 한일 교류전시를 같이 진행한 일본 큐레이터가 “한국의 작가들은 왜 다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다. 당시 전시에 참여한 일본 작가들은 대체로 순수 미학적인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나는 오히려 동시대 미술이 어떻게 현실을 외면하고 성립할 수 있냐고 되묻고 싶었다. 분명히 독자적이고 탄탄한 시각 예술의 전통을 가진 일본이 동시대 미술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해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내심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예술이 현실을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부조리로 가득하고 역사는 대체로 상처투성이다. 이런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나를 한없이 우울에 빠트릴 것이 분명한 디멘터를 굳이 제 발로 찾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어떤 예술가들은 기꺼이 세상의 독을 견딘다. 뜨거운 납에 데고 우울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한다. 키퍼가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사빈=미술사학 석사 공부(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마치고 국제갤러리 큐레이터를 거쳐 2011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기획, 소장품 연구를 하고 있다. ‘우리가 알던 도시’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3부’ 전시회를 기획했고, 미술서 『어떻게 예술작품을 되살릴까』 『This is Art』를 단독 또는 공동번역했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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