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2025-02-03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자신을 서울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선배라고 소개 하신다. 동문회 소식지를 통해 나를 알게 되었는데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셔서 오시도록 했다.

산업은행에서 퇴직 후 은퇴생활을 하는데 귀농 관련 조언을 듣고 싶다고 하신다.

예전에 업무를 담당했던 관계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조언을 드렸다.

대화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분이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는 것이었다. 후에 그 분과 동기생인 고모부에게 여쭤보니 그 선배님은 서울법대 출신이라고 한다.

한 해에 서울대를 180명씩 갔던 학교라지만 서울법대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어쩌면 그것은 그 선배님이 그토록 자신 있게 학벌주의를 비판할 수 있었던 자신감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얘기가 결코 ‘여우의 신포도’가 아니라는 근거.

그 분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내가 아는 고교 선배님들 중엔 전통의 사립 명문대나 서울 소재 의대를 나오고도 자부심보다는 콤플렉스를 표현하는 것을 적잖게 봤다.

때로 학벌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 선배님들을 떠올린다. 오해는 마시라. 자신이 나온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다니는 부산대에 대한 강한 애정과 자부심을 보여줬던 여학생. 경북대를 지역 엘리트 산실로 자부하는 대구 사람들 모습. 그들이 보여준 것은 타인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자존감을 잃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자부심이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전제는 타인에 대한 인정과 배려다.

비교하는 사회에서 최종 승자는 없다. 이른바 명문대를 갔지만 서울법대를 간 동기생을 보면서 좌절감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사람의 능력은 각양각색이다. 모두가 손흥민이나 김도영이 될 수 없듯이 공부도 그렇다.

수능을 마친 조카 수범과 고1 정원이가 집에 왔다. 순창 훈몽재와 전봉준 피체지를 돌아보고 가는 날. 정원이가 친구들과 소원한 것 같다고 걱정하는 여동생 말이 떠올라 물었다.

“정원아. 친구들과 잘 지내?” 그러자 정원이가 답했다.

“엄마가 괜한 말을 해가지고. 무용담을 얘기해줄게요. 한 친구를 6~7명이 괴롭히고 있어서 제가 그 친구를 보호해줬어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대답에 순간 놀랐다.

확인한 것은 정원이가 이 사회에서 정말 소중한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사실이다.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보면서 외면하지 않고 양심을 실천할 수 있는 정원이가 서울법대를 못 간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차에서 이승철의 노래를 듣던 중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라는 가사가 나오자 여섯 살 정원이가 물었다.

“삼촌, 왜 슬픈데 행복해?”

정원이에게 내가 더 가르칠게 없다.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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