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손영남 편집국 부국장)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개다.”
이 대사, 낯설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을 거다. 물론 그러면서 또다시 개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이젠 그조차도 오래전의 기억, 아니 추억에 불과하다. 터무니없이 줄어든 체력, 공기만큼 가벼워진 지갑의 무게는 그런 만용을 더 이상 허락지 않는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나는 인간이다. 적어도 주식이란 걸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다시 주식을 하면 말미잘이다. 아니, 아메바다.”
그나마 포유류이던 시절의 영화는 더 이상 없다. 주식을 시작하고 난 후의 나는 단세포 생물, 아메바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왜 하필 아메바냐고? 감정도 없고, 뇌도 없고, 자극에 반응만 하는 단세포 생물. 주가가 오르면 환호하고, 떨어지면 분노하는—그러다 결국 다시 클릭하는—그 모습이 아메바가 아니면 무얼까.
이런 보잘것없는 아메바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이 아메바의 진화를 이끌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싹튼 때문이다.
내 이름은 소액주주, 현실은 ‘소외주주’
어감만 놓고 본다면 소액주주란 이름은 참 고상하다. 소액이라는 접두사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주인이기는 하니 말이다. 이거야말로 무지의 발상 그 자체다. 소액주주란 곱상한 명칭이 무색하게도 현실의 나는 ‘소외주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때문이다.
한 기업의 주인이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는 주총은 대기업의 잔치에 불과하고 주주라면 누구나 행사할 수 있다는(논리적으로는 그렇다) 의결권은 대주주의 고유 권한에 불과한 이 시점에서 소액주주인 나는, 그리고 우리는 늘 구경꾼일 수밖에 없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주가 조작, 내부자 거래, 꼼수 합병의 굵직굵직한 뉴스가 터져 나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하고 비루한 아메바, 그게 소액주주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다음 날이면 또다시 매수 버튼을 누르는 단세포 동물의 삶이라니.
그래서였다. 정부가 상법 개정안을 통해 소액주주의 권리를 대폭 강화한다는 발표를 내놓았을 때 한 가닥 희망을 가진 건. ▲ 감사 선임 시 대주주의 의결권 제한 ▲ 집중투표제 도입 권고 ▲ 주주제안권 요건 완화 등 이번에 통과된 상법 개정안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하던 소액주주들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정의의 기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를 두고 기업의 경영 활동을 위축시킨다느니 주가를 떨어뜨릴 거라느니 하는 식으로 초를 치는 부류들이 창궐했지만 결국엔 통과로 귀결됐다.
안다. 법이 바뀌었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걸. 기업들은 여전히 꼼수를 고민하고, 대주주는 여전히 ‘주주’보다 ‘주둥이’를 더 믿을 거라는 것도. 그럼에도 아메바에게 촉수가 생긴 지금이 이전과 같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번 상법 개정안이 기업 지배구조의 판을 다시 짜는 제도적 전환점이라고 말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동안 기업 경영의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던 소액주주에게 이 개정은 단순한 법률 변경을 넘어, 실질적인 권리 회복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사의 충실 의무가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 전체’로 확대되면서, 기업의 의사결정에 소액주주의 권익이 법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전까지 이사의 충실 의무는 회사라는 법인 자체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기업의 의사결정은 주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대주주 중심의 경영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던 한국 기업 환경에서 소액주주의 권익은 종종 무시되거나 희생되기 일쑤였다. 이번 개정은 그런 구조적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첫걸음이다.
전자 주주총회 의무화 역시 주목할 만하다. 자산 총액 2조 원 이상 기업은 2027년부터 전자 주총을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이는 지방이나 해외에 거주하는 소액주주에게 실질적인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물리적 거리나 시간 제약으로 인해 주총에 참석하지 못했던 투자자들이 이제는 클릭 한 번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주 민주주의가 기술을 통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감사위원 선임 시 의결권 제한 강화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기존에는 대주주가 감사위원 선임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회계 감시 기능이 무력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개정안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3% 룰을 강화하고, 감사위원 선임 시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함으로써 기업 내부 견제 기능을 실질화했다. 이는 기업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주식 시장에 빌붙어 사는 소액주주들이 호재라고 일컬을 만한 요소지만 모두에게 다 그런 건 아니다. 법 통과 직후 엇갈린 시장의 반응이 그를 증거한다. 실제로 개정안 통과 이후 일부 대기업 주가가 흔들리기도 했다. 경영권 불안과 소송 리스크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선 안 되지만 주식 시장의 변동 상당수는 이런 미지의 공포들이 현물화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조차도 시장을 판단하는 지표라고 한다면 뭐라겠냐만은 결국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본질적인 팩트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흔들리던 시장은 곧 방향을 틀었다. 삼성전자, SK, LG 같은 기업들이 주주환원 정책을 강화할 것이란 기대가 커지면서, 증권주와 지주사 중심으로 반등이 시작됐다. 일평균 거래대금은 15조 원을 넘어서며 투자자들의 관심이 폭발했다. 코스피의 PBR(주가순자산비율)은 0.93배에서 1.1배까지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으며, 이는 한국 시장이 ‘저평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이러한 흐름은 상법 개정안이 단기적 불안보다 중장기적 신뢰 회복의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기업의 투명성과 주주친화적 정책이 강화되면, 결국 시장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소액주주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법 개정안은 단순한 법률 조항의 수정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 운영의 원칙과 문화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이며, 그 중심에 이제 소액주주도 함께 설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는 투자자가 아니다. 이제는, 우리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시대다.
물론 이 개정안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업의 부담을 고려해 ‘권고’ 수준에 머문 조항도 많고, 시행령에 따라 실효성이 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법이란 원래 그렇다. 법은 완벽한 정의가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을 조금씩 밀어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기껏 손에 쥐어준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어리석음은 두 번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다.
어제와는 조금 달라진 모양새를 지닌 어느 아메바는 오늘도 창밖을 바라보며 촉수를 까딱거리는 중이다.
“빨개져라, 빨개져라.”
어라, 입도 없는 아메바가 말을 한다. 어쩌면 난 더 이상 아메바가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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