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가려(民生可慮, 민생이 가히 염려스럽다) -①

2024-12-26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의 산업 곧 먹고 사는 길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사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서양은 농축업의 기본 틀인 봉건제에서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 진데 견줘 동양은 기술발전에 늦어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중세 왕권제도 시대 세종은 농업이 주 산업인 시대에 만약 가뭄이 들면 민생 대책을 어떻게 세웠을까? 이러한 연구를 하려면 다른 시대, 다른 임금들과 견줄 필요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 세종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는 것을 통해 세종의 정치 지도력ᅇᅳᆯ 알아보기로 한다.

‘‘민생가려’라는 백성의 먹고사는 일에 대한 배려를 세종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시기적으로는 오가고는 하지만 재해를 맞아 일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순서와 시기를 고려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에 대해 출현 횟수를 보면 국역 모두 3,463건 가운데 세종 323건, 성종 454건, 중종 474건, 숙종 224건, 영조 255건 등으로 중종, 성종 다음으로 많았다. 유사한 ‘장마’를 찾아보면 모두 930건 가운데 세종 105건, 중종 54건, 선조 68건, 정조 68건, 고종 67건 등이다. ‘장마’는 세종 때 가장 많았다. 실제로 악재를 만났는지 실록의 기록이 세종 때는 충실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은 자연의 혜택을 많이 누리지 못한 임금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세종 때 토지 개간이 가장 많았다는 다른 농업 통계는 세종의 한재(旱災)와 농업 대책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참고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와 있는 전결(田結, 논밭에 매기던 조세) 수와 호구 수를 도별로 정리해 태종 4년 의정부에서 조사한 각도 전답호구 수와 견준 자료가 있다.

여기서 보면 태종 4년 이후 약 25년 동안 전국의 전(밭)과 호구 수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전(田)에서 태종 4년 경기도를 빼고서도 642,352결이 증가해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집[戶]과 식구(口)도 각기 27,607호, 319,339명이 늘었다.

이와 같은 밭ㆍ집ㆍ식구의 증가는 토지의 개간, 인구 자연증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불과 25년 만에 거의 배에 달하는 토지의 개간과 호구에서 자연증가가 가능했다고 믿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곧 국가가 직접 지배하는 토지의 증가ㆍ호구의 늘어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증가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추진되었던 집권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국가의 수세지(收稅地)와 역역 동원의 대상자를 적극적으로 파악했던 결과일 것이다.(정두희, 《왕조의 얼굴》, 서강대학교출판부, 2010, 178~179쪽)

이상에서 보면 평안도와 함길도의 개간지가 대폭 늘어났고 국가의 지배 토지가 늘어나고 통제체제가 확립되어갔음을 보게 된다. 세종의 4군 육지의 개척은 단순한 영토의 개척이 아니라 그 안의 밭의 증가로 백성이 생업 안정을 기하고 생민화에 이르게 됨을 뜻한다.

이런 노력으로 고려 말까지 50만결에 불과하던 농지면적이 세종 때에 이르러 167만결로 세배 이상 늘었다. 이는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에 따른 밭과 개간지의 세제 문제의 조정이 있게 되고 당연히 농민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일었을 것이다.(참고: 결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곡식 100짐을 수확하는 토지면적으로 비옥도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10줌이 1뭇이고 10뭇이 1짐이고 10짐이 1동이고 10동이 1결이다.)

세종은 1418년 8월 11일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뒤 처리할 일도 많았을 것이다. 즉위교서(11일), 종묘나 상왕전의 일(12일), 주문사(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수시로 보내던 사신)와 종묘 제실과 능묘(13), 종묘, 왕족이나 주위 인척에게, 그리고 명을 비롯한 외국 주문사와의 관계(13일), 유구, 왜인 방문, 소격전(하늘과 땅, 별에 지내는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던 관청) 문제(14일) 기타 상왕 방문, 여러 도의 손실(損失) 답사(17일), 이런 가운데 흉년이기에 여러 곳을 답사(21일)하게 된다. 여러 국가 정책을 구상하고 차례차례 살펴나갈 수도 있겠으나 본격적인 첫 정무가 민생으로 흉년 대비가 되었다. 즉위한 지 10여 일 만에 흉년 대비책을 강구하게 되는 것이다.

(흉년이므로 호조에 명하여 사전도 아울러 정확히 답사하도록 하다)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올해에는 풍수(風水)의 재앙으로 벼 등 곡식이 잘 익지 않아 백성들의 생계가 염려되니, 각도의 경차관(敬差官)에게 영을 내려 모름지기 벼를 베어 거두기 전에 개인 밭도 아울러 답사하게 하되, 아무쪼록 정확하도록 힘써서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즉위년/8/21)

정확히 조사

가뭄 대책의 하나로 구체적으로 수행할 일은 개인 밭까지를 포함해 정확한 현장조사였다.

이어 한 달여 뒤에는 답사하러 나간 경차관이 잘못 답사한 데 대한 처리문제 등이 발생한다.

(사헌부에서 경차관이 잘못 답사한 토지의 처리 문제 등을 아뢰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 금년에 풍수재(風水災)로 말미암아 곡식이 잘 익지 못하여 민생이 염려되니 모름지기 곡식을 베어 타작하기 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하여금 때에 맞추어 답사(踏査)하게 하되, 공사(公私)의 양편에 다 편하도록 힘쓰라 하옵시니,...경차이 혹 게으른 마음이 생겨 친히 두루 다니며 살피지를 못하고, 또 수령과 위관(委官)도 성상께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뜻을 받들지 아니하고 사사롭게 의심하며 염려하여, 혹 농사가 잘못된 것을 잘된 양으로 보고하여 호소할 곳이 없는 궁곤한 무리들이 앉아서 그 해를 받게 하오니, 청컨대 경차관이 잘못 답사한 토지는 작인들로 하여금 감사(監司)에게 고하게 하고, 감사는 수령관을 시켜 다시 답사하게 하여, 올바르게 시행하도록 하시옵소서.

전하께옵서 즉위하신 처음에 연사(농사가 되어 가는 형편)가 별로였으니, 모든 긴요하지 않은 영선(營繕ㅡ 건물을 짓거나 수리함) 사업은 모두 정지하며 또는 그만두라고 영을 내리셨으나, 각도의 수령과 진(鎭) 병마사 등이 군기(軍器)를 제조하며, 성곽과 창고를 수선하는 일이 종종 있고 또 국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들은 굶주리지 않는다고 하여, 은산(殷山)⋅태천(泰川)⋅가산(嘉山)⋅곡산(谷山) 등의 고을에서는 은을 캐어 내게 하고, 서흥군(瑞興郡)에서는 납[鉛]을 캐게 하고 있습니다. 본부에서는 근자에 공문을 그 도감사에게 보내어, 농사의 풍흉(豐凶)과 아울러 풍수의 재난으로 곡식의 부실 여부를 물었습니다.

... 긴요한 것이거나 긴요하지 않은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일절 모두 정지하고 그만두어, 그들로 하여금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일하게 하여 주십시오. 수령이 의창(義倉,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나 비상 때 가난한 백성에게 빌려주던 기관)에 군자(軍資)를 세금을 거둘 때에, 친히 감독하지 않고 감고(監考, 곡식의 출납과 간수를 하는 이)에게만 맡기어, 한 사람이 바치는 바가 비록 몇 섬에 이르더라도, 그것을 휘(斛, 열 말)로써 양을 헤아리지 않고, 모두 말[斗]과 되[升]를 써서 많이 징수하고, 또 들이고 낼 때에 땔나무와 이엉 짚을 백성들에게 거두어 받아 백성들의 원통함이 진실로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수령이 친히 세금 거두는 것을 감독하고, 바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수량을 헤아리도록 하여, 만일 남는 것이 있으면, 곧 그 바치는 자에게 돌려주고 이를 어기는 자가 있거든, 곧 법률에 따라 벌을 주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좇았다⟪(세종실록⟫ 즉위년 9/25)

당시 공무원의 비리를 구체적으로 적시해 올리는 세종 당시의 행정제도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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