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인 이태구(미국명 태쿠 리·Taeku Lee) 미국정치학회(APSA) 회장이 “최근 미국에선 언론·사법부·대학 등 인식기관(epistemic institutions)에 대한 공격이 심화하고 있다”며 “허위정보의 범람을 막기 위해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플랫폼에 대한 포괄적 규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2일부터 닷새간 열린 제28회 세계정치학회(IPSA) 서울총회 참석 차 한국을 찾은 이 회장은 17일 중앙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앞서 이 회장은 IPSA 서울총회 폐막일인 지난 16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한 라운드테이블에서 ‘민주주의 붕괴와 포퓰리즘 딜레마’를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통치 방식을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외형은 민주주의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왜곡 현상)’라고 진단하며 “시민의 저항 운동으로 두 차례 대통령을 탄핵한 한국의 사례가 경쟁적 권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착한 포퓰리즘(good populism)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산 출신인 이 회장은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정착한 미국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한국계 정치학자다. 2002년부터 UC버클리대 로스쿨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22년 하버드대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인종·민족 정치, 정체성과 불평등, 여론과 정치적 행태, 숙의·참여 민주주의 등에 관한 연구에 매진해 온 그는 지난해 9월부터 미국정치학회장을 맡고 있다. 아래는 일문일답.

트럼프 대통령의 ‘경쟁적 권위주의’ 통치 방식의 작동 배경은.
“한국과 미국은 최소한의 기준으로 모두 민주국가이지만, 각기 다른 형태와 역사적 경로를 통해 현재에 이르렀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까지 권위주의 국가였던 역사가 있어 유권자들이 국가 권력의 남용, 언론 통제 시도,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등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미국은 최근 그런 경험이 없다.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카리스마, 치솟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현 정부에 대한 반감’ 분위기에 더 쉽게 휩쓸린 이유다. 트럼프 지지자 중 상당수가 현재 그가 보여주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의 속도와 강도에 놀라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선도국인 미국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는 이유는.
“장기적인 경제적 변화가 유권자들 사이의 분노와 좌절감을 키웠다. 이에 따라 정치·경제·사회 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졌다. 특히 이러한 분노와 좌절의 책임을 소수 민족이나 이민자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심해졌다. 이 같은 경향은 결국 음모론이나 허위·왜곡 정보에 대한 수요로 이어진다.”
미국도 정치적 양극화 현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정치적 양극화는 국가별로 고유한 요인이 있다. 미국의 경우 프라이머리(예비 선거) 제도가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후보를 선출할 가능성을 높인다. 또 라틴계·아시아계·아프리카계 등 소수 인종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공화당 정치인들이 점차 극단적인 정책을 채택하는 일종의 ‘비대칭적 양극화(asymmetric polarization)’가 나타났다.”

이 회장은 최근 언론·과학자·사법부·대학 등 민주주의 인식 기관을 향한 공격 현상을 우려하면서 “이러한 공격은 허위 정보가 범람하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인 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해법은.
“이념의 양극화가 심화한 민주국가의 공통점은 중도층·무당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정당과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며 실망한 것이다. 결국 정부가 주거비·교육비·의료서비스 등 시민들의 기본적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허위·왜곡 정보는 이러한 양극화와 언론·학계·사법부에 대한 공격을 부추긴다. 메타·X(옛 트위터)·유튜브 등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플랫폼 기업에 대한 포괄적인 규제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