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 시장 개방 확대,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은 ‘양보 가능’, 온라인플랫폼법 시정과 과일 검역 완화는 ‘협상 여지’. 쌀 시장 개방은 ‘협상 논외’.
이제 “선택과 결정의 시간”(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라는 한ㆍ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이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 받아들이기 힘든 저지선은 어디인지를 나타내는 현주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고한 ‘8월 1일 관세’ 부과를 보름여 남긴 14일(현지시간) 중앙일보가 한ㆍ미 양국 정부 당국자와 통상 전문가 등에 대한 취재를 종합한 결과다.
협상 시한이 가까워지면서 전방위로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는 미국의 요구는 크게 ▶자동차 시장 개방 확대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 등 먹거리 시장 확대 ▶온라인플랫폼법 완화를 비롯한 디지털 무역장벽 해소 등 3가지로 모아진다.
“차 규제 완화해도 불리하지 않아”
이들 중 한국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양보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우선 꼽히는 것은 자동차 환경규제 완화를 통한 시장 개방 확대다.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지난 3월 펴낸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NTE)’에서도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의 한국 자동차 시장 접근성 확대는 미국의 핵심 우선순위”라며 중요성이 강조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요구를 일부 수용해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를 다소 완화하더라도 한국 시장에서 대규모 판매 증가로 이어지긴 어렵다고 보고 있다. 태미 오버비 전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ㆍ암참) 대표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수입차를 구매하는 한국 소비자들은 메르세데스 벤츠 등 럭셔리한 라인업을 선호하고 미국 차는 투박하고 기름이 많이 든다는 이미지가 강하다”며 “한국의 자동차 시장 구조와 잘 맞지 않기 때문에 환경 규제를 철폐해도 크게 불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비중 미미”
먹거리 분야에서는 철저한 검역 및 위생 기준 준수를 조건으로 한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 금지 해제가 거론된다. 2008년 광우병 사태 이후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는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데, 미국은 “2008년 한국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완전히 개방하기로 하고 임시 조치로 30개월령 미만 소고기 수입을 허용한다고 했지만 그 임시 조치가 16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 일각에서는 한국은 이미 미국산 소고기를 연간 약 26만t 수입(2023년 기준)하는 최대 수입국인 데다 전체 미국산 소고기 중 30개월령 이상은 2~3%로 미미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수입 금지를 풀 때가 됐다는 의견이 나온다고 한다. 다만 ‘광우병 트라우마’ 극복 등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이슈다.
감자 등 LMO 작물 수입도 기술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시각이 꽤 있다. 이미 지난 3월 농촌진흥청은 미국 심플롯사의 LMO 감자에 대해 7년 만의 ‘적합’ 판정을 내린 바 있으며, 해당 감자의 수입 절차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인체 안전성 검사만 남은 상황이다.

쌀 개방 논의 아직 없는 듯
먹거리 분야에서 미국은 사과ㆍ블루베리ㆍ체리 등 과일 검역 완화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1993년 한국에 자국산 사과 수입 위험분석을 신청했는데 지금까지 33년째 8단계 검역 절차 중 2단계 문턱을 못 넘고 있다. 한국 정부가 국내 과수농가의 피해를 우려해 방어막을 폈기 때문이다. 여 본부장은 최근 농림축산식품부에 사과 수입의 전향적 검토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현실화할 경우 과수 농가와 생산자협회의 조직적 반발이 우려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정부 고민이 깊다.
쌀 시장 개방은 정부가 사실상 ‘수용 불가’를 외치는 레드라인이다. 쌀은 한국 농업의 근간이자 국민 주식이라는 점에서 가장 민감한 품목이다. 미국 정부도 이런 배경을 잘 아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설탕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노터치’ 품목으로 인식하듯 한국에서 쌀은 일종의 성역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미 정부 협상팀이 잘 안다”며 “지금까지 한ㆍ미 협상 테이블에 쌀 시장 개방이 오른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플랫폼법 규제 완화 가능성
미국이 문제 삼는 디지털 분야 비관세 장벽과 관련해서는 플랫폼법 규제 완화, 위치 기반 데이터 반출 허용 등의 가능성이 거론된다. 정부는 디지털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규제하고 중소 디지털 기업과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취지에서 플랫폼법 도입을 추진해 왔지만 법 적용 대상 범위, 처벌 강도 등에서 조정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구글과 애플이 요구하는 고정밀 지도 데이터 해외 반출은 정부가 그간 군사시설 노출 우려 등 안보 관점에서 수용을 거부해 왔지만 고해상도 상업용 위성 서비스가 이미 확산된 상황에서 타당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韓 대응 전략…‘쉽스&칩스’ ‘패키지 딜’
이들 미측 요구에 맞서 한국이 활용할 수 있는 협상 무기로는 우선 한ㆍ미 제조업 협력 확대 카드가 꼽힌다. ‘미국 제조업 부활’을 외치는 트럼프 정부에 한국이 비교우위인 조선ㆍ반도체 등 첨단 제조업 분야 협력 강화를 지렛대 삼아 협상력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안세령 주미대사관 경제공사는 14일 한미경제연구소(KEI) 주최 대담에서 “한국은 신뢰받는 동맹으로 ‘제조업 재건’이라는 트럼프 대통령 비전을 지원할 독보적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이 조선과 반도체 등 산업에서 미국의 재건을 돕는 대신 관세를 완화하는 방향의 협상을 추진한다며 이를 ‘쉽스 앤 칩스(Ships and Chips)’라고 표현했다.
최근 방미한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통상ㆍ투자ㆍ구매ㆍ안보 현안을 묶어 포괄적으로 협의하는 패키지 협상을 추진한다고 했는데, 효과적인 대응 전략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버비 전 대표는 “패키지 협상 전략은 전선을 넓혀 타결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는 권할 게 못되지만 모든 사안을 관세로 엮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에서는 좋은 접근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미 투자 확대도 한국이 쓸 수 있는 카드다. 정부는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 참여를 압박 중인 미국에 일단 기초 자료를 요청한 상태다. 개발 사업 진출이 어려울 경우 미국산 가스 등 에너지 수입 확대로 미국을 설득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