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보다 거시, 개별 사업보다 전체 예산규모 감시가 중요

2025-10-22

국회의 예산권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국회의 가을은 분주하다. 다음 주에 국정감사가 마무리되면, 곧바로 예산 정국이 시작된다. 국회는 내년도 예산안을 12월 2일까지 심의해서 확정해야 한다. 예산안의 심의·확정은, 민주주의 국가라면 모두 갖추고 있는 의회의 고유 권한이다. 애초 의회제도의 탄생 배경이 왕이 맘대로 세금 부과하고 함부로 재정 쓰는 것을 제어하기 위함이었으니, 예산권은 과세권과 함께 의회의 가장 중요한 양대 권한이자 책무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모든 국회의원은 국민의 혈세(!)가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각자 상임위원회에 할당된 예산안을 꼼꼼히 따져보고 조금이라도 낭비될 여지가 있다면 낱낱이 밝혀야 하겠다. 당위적으로는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예산 심의는 정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기 일쑤이며(지난해에도 그랬다), 흔히 염불보다는 잿밥, 지역구 사업 챙기기에 골몰한다고 비판받는다. 대체 왜 국회 예산 심의는 늘 그 모양일까. 그 연유를 따져보고 예산 심의의 성과를 높이는 방도를 강구해 보자.

맘대로 세금 걷고 빚져서 국민부담 늘리는 전횡 막는 게 거시 기능

개별 사업 적정성 평가하는 미시 기능은 예산안 공개 자체로 작동

OECD 모범국 스웨덴·스위스·독일, 중기 수지 균형이나 흑자 의무화

우리도 중장기 재정 운용 목표 설정하고 강제하는 장치 마련해야

사업예산 적정성 평가, 전문가도 힘들어

부실한 예산 심의의 이유로서 흔히 짧은 심의 기간과 국회의원의 전문성 부족을 든다. 행정부는 법에 따라 늦어도 9월 초에는 예산안을 국회에 보내야 한다. 국회는 12월 2일까지 확정해야 하니, 90일 정도 심의 기간이 확보된다. 90일이면 충실한 심의에 절대 부족하지 않다. 문제는 실제로 심의에 할애하는 기간은 법정 기간보다 훨씬 짧다는 데 있다.

예산 심의는 국정감사가 끝나야 시작한다. 법에는 국감을 9월 내에 끝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통상 10월 하순이 되어야 끝난다. 그러니 한 달 정도만 남는 셈인데, 이 기간도 오롯이 예산 심의에 사용되지는 않는다. 예산 심의 착수 이전에 공청회와 종합 정책 질의 등의 절차를 거친다. 여기에 휴일과 휴회 등을 제외하면 실제 심의 기간은 보름도 채 안 된다. 이 정도 기간으로 충실한 심의를 기대하기 어렵기는 하다.

재정을 전공하는 필자도, 정부가 제출한 예산서만 보고 사업예산의 적정성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예산서에 기재된 짤막한 설명만 보면 다 필요한 사업인 듯싶고, 간략한 경비 내역만으로는 낭비 여부를 알 길이 없다. 하물며 국회의원들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예산 심의를 지원하는 전문인력이 존재한다. 국회사무처와 국회예산정책처 소속 재정 전문가들이 예산 심의를 돕는다. 이런 지원조직의 도움 위에 보좌관들 수고가 더해진다면 부실한 예산사업들을 제법 찾아낼 수 있다. 문제는 그럴 의지가 있느냐다.

지역구 챙기는 쪽지예산 구태 여전

예산 심의는 소관 상임위원회의 예비 심사와 예산결산위원회의 종합심사로 나눠진다. 국토교통·보건복지 등의 상임위원회는 아무래도 해당 분야의 이해에 민감하니, 소관 부처 예산안에 대해 너그럽다. 그래서 상임위원회의 예비 심사를 거치면 행정부 원안보다 오히려 증액된다. 상임위에서 증액된 예산은 예결위의 심사 과정에서 다시 삭감된다. 명색이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장인지라, 예결위는 행정부 원안보다는 총액을 줄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감소 규모는 미미하며 오히려 낭비를 조장하기도 한다. 쪽지예산 혹은 카톡 예산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예산 심의 과정에서 원안에는 없던 지역구 사업을 끼워 넣는 행태를 지칭한다. 예전처럼 명시적으로 쪽지를 건네거나 카톡을 보내지는 않지만, 지역구 사업 끼워 넣기는 여전하다. 이번에도 연말연시가 되면 국비 확보를 홍보하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어김없이 걸릴 것이다. 지역구 사업을 끼워 넣더라도 총액 자체를 늘릴 수는 없으니 증액하는 것보다 살짝 큰 규모로만 감액한다(이를 위해 행정부가 감액의 여지를 두고 예산안을 짜기도 한다). 지난해는 예산심사가 파행되었으니 논외로 하고 재작년 경우를 보면 정부 원안은 656조 9000억원이었는데, 심의과정에서 4조 7000억원 감액과 4조 5000억원 증액이 이루어져 최종 656조 6000억원, 원안과 거의 동일한 액수로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예산 심의 행태에 너무 실망하거나 분개하지는 말자. 다른 나라도 대동소이하니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나라 국회의원들도 이익집단과 지역주민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게다가 시스템 자체가 국회 심의를 통해 행정부 예산안을 크게 수정할 수 없게 되어있다. 대부분의 선진국 또는 민주주의 국가는 우리와 미국 등 몇몇을 제외하면 의원내각제이다. 의회 다수당이 행정부를 구성하니, 행정부 예산안은 곧 다수당 예산안이다. 그래서 행정부 예산안이 의회 심의과정에서 거의 바뀌지 않는다.

국회 예산심의 거시 기능 매우 빈약

그렇다면 과연 의회의 예산 역할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거시 기능과 미시 기능이 있다. 거시 기능은 전체 및 분야별 예산 규모를 따지는 것이고 미시 기능은 개별 사업예산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의회의 예산 역할로는 거시 기능이 훨씬 중요하다. 앞서 왕(행정부)의 재정 전횡 통제가 의회 탄생 배경이라고 했다. 재정 전횡을 통제한다는 것은 맘대로 세금 걷고 빚져서 국민 부담 늘리는 것을 막는다는 것인데, 이게 바로 거시 기능이다. 현대 국가의 재정 운용에서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핵심 덕목인데, 이를 확보하는 것 역시 거시 기능이다.

사실 개별 사업예산을 평가하는 미시 기능을, 이익집단과 지역주민 눈치를 봐야 하는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국회의 사업예산 심의가 불필요한 것은 전혀 아니다. 예산 통제의 미시 기능은 심의 절차의 ‘존재’ 자체로 상당 부분 달성되기 때문이다. 심의 절차에 따라 행정부는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하고 대외적으로 공개한다. 그러면 예산정책처 같은 예산지원기관 및 언론, 시민단체 등이 검증한다. 그러니 허투루 편성하기 힘들다. 예산안 공개라는 절차 덕에, 부적절한 사업예산의 예방과 적발이 이뤄진다.

우리의 예산 심의는 거시 기능이 매우 빈약하다. 예산안 심의 직전에 전문가들을 불러놓고 공청회를 한다. 여기서 전문가들은 예산 규모가 얼마나 커졌고, 향후 국가채무는 얼마나 늘 것인지 등 재정 지속성과 관련해 진술하고 여야 국회의원과 질의응답을 벌인다. 거시 기능은 이걸로 끝이다. 심의가 시작되면 소관 상임위원회와 예결위는 개별 사업예산만 따지는 미시 기능에만 집착한다.

재정준칙 강력한 나라일수록 재정 건전

다른 나라 의회의 거시 기능은 어떻게 작동할까? 이익집단과 지역주민 신경 쓰는 탓에 사심 없는 사업예산 심사도 어려운 판국에, 중장기적인 재정 지속가능성을 얼마나 고민할까? 어느 나라든 재량에 맡겨두면 절대 재정 지속가능성에 도움 되는 심의는 이뤄질 수 없다. 그래서 절차를 통해 강제한다. 대표적인 것이 중기재정계획과 재정준칙이다.

중기재정계획은 향후 3~5년의 수입과 지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개별 사업은 따지지 않고 총액 및 분야별로만 설정한다. 이를 의회에 제출해서 승인받고 그에 맞춰 매년의 예산안을 짠다. 재정준칙은 재정적자 또는 국가채무를 얼마 이하로 제한하도록 법규로 강제하는 것이다.

선진국, 아니 중진국까지 포함해서 정상적으로 재정 운용하는 나라는 대부분 중기재정계획과 재정준칙을 두고 있다. 물론 실제 운용은 나라마다 다르다. 원칙대로 강력하게 운용하는 국가도 있고, 제도는 만들었으나 다양한 예외를 허용해서 느슨하게 운용하는 국가도 있다. 당연하게도 관련 실증연구 결과는 강력하게 운용할수록 재정이 건전함을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중기재정계획과 재정준칙 운용 잘하기로 소문난 곳이 스웨덴·스위스·독일 등이다. 〈그래프 참조〉 이 국가들은 경기상황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적자를 보여도 중기적으로는 수지균형 또는 흑자(스웨덴)를 유지하도록 강제한다. 독일은 2010년부터 중기 수지균형 원칙을 도입했다.

국회 심의·승인도 없는 중기재정계획

우리도 국가재정운용계획이라는 이름의 중기재정계획을 수립한다. 단, 우리는 국회에 제출만 할 뿐 심의는 없고 승인받을 필요도 없다. 게다가 재정준칙도 없다. 그래서 매년의 예산안은 중기재정계획과 상관없이 짜인다. 재정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장치가 부재하니, 거의 매년 적자였고 국가채무는 계속 높아졌다. 아직 절대적 수준은 높지 않다고 해도, 유례없이 빠른 고령화를 고려하면 우리의 재정 여력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성장동력 확보를 이유로 내년 예산안은 확장적으로 편성됐고, 상당 규모의 재정적자가 발생할 예정이다. 급박한 대내외 여건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대규모 적자재정 운용이 마냥 가능할 수는 없다. 이번 정권에서 재정 여력을 소진하면, 다음 정권은 어찌하겠는가. 이제는 중장기 재정 운용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때이다. 이게 국회에 부여된 예산권을 제대로 활용하는 길이기도 하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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