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백끼
중앙일보·홍콩관광청 공동기획 I 홍콩백끼
홍콩 사람이 지오디(god) 히트곡 ‘어머님께’를 듣는다면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겠다. ‘외식 못 한 게 가난해서라고? 그럼, 하고한 날 삼시 세끼 사먹는 우리는?’
홍콩에 ‘집밥’이나 ‘엄마 손맛’ 같은 개념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의 당혹감은, 산타가 실은 아빠였다는 진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줬다. 알고 보니 홍콩은 일찍이 외식 문화가 뿌리내렸다. 돈이 많아서 끼니마다 사 먹은 건 아니었다. 외려 돈을 아끼려고 나가서 먹었다.
홍콩은 소득 대비 집값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도시다. 부동산 시세가 서울은 물론이고 뉴욕‧런던보다 비싸다. 하여 홍콩의 집은 작아야 했다. 그래야 집세 내고 겨우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그렇게 집을 줄이다가 끝내 포기한 게 부엌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 냉장고·가스레인지 들여 더 좁게 사느니 차라리 밖에서 끼니를 때우기로 작정했다. 홍콩의 부엌이 집이 아니라 거리에 나앉은 사연이다.
삼시 세끼를 바깥에서 해결하는 홍콩인에게 편안한 부엌이 되어주는 식당이 바로 차찬텡(茶餐廳)이다. 이름 그대로다. 차(茶)와 음식(餐)을 함께 먹는 곳. 밀크티·커피는 기본이고 샌드위치·토스트·에그타르트 같은 서양식까지 없는 게 없다. 모든 메뉴가 아무리 비싸도 60홍콩달러(HKD). 우리 돈으로 1만원을 넘기지 않는다.
음식이 싸고, 빠르고, 다양하다는 특징 덕분에 차찬텡은 한국인 여행자에게 ‘홍콩의 김밥천국’으로 통한다. 하나 그걸로는 2% 부족하다. 메뉴가 50가지가 넘는다는 김밥천국도 밀크티는 내리지 않는다. 돈가스는 있을지 몰라도, 프렌치토스트나 에그타르트까지 굽는 경우는 없다.
이번 주 홍콩백끼는 홍콩 대중 식당의 대명사 차찬텡에 관한 이야기다. 홍콩 사람은 물론이고 박찬일을 비롯한 한국의 음식 전문가도 홍콩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식당으로 주저 없이 차찬텡을 꼽는다. 2007년 홍콩입법위원회 한 의원이 차찬텡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했던 것도 차찬텡이 지닌 독보적인 역사적·문화적 위상 때문이다. 카페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당도 아닌, 중국과 서양의 음식이 뒤섞인 이 국적 불명의 공간에 홍콩의 부침 심한 역사가 차곡차곡 쟁여 있다.
뜨거운 물에 계란 동동 – 미도카페
아무리 퓨전이라도 이 정도 역사를 가졌으면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차찬텡은 70여 년의 세월을 헤아린다. 찬 음료를 팔던 찻집 ‘뺑삿(氷室)’이 차찬텡의 원형이다. 이름을 다시 보자. 한자로 ‘빙실’, 얼음집이다. 뺑삿에서는 얼린 우유, 얼음물, 아이스크림, 밀크티 같은 음료와 토스트 같은 간단한 간식을 팔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뺑샷은 스테이크·커피·파스타 같은 서양 음식도 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뺑삿은 차찬텡으로 진화했다. 다시 말해 카페보다 식당에 더 가까워졌다. 차찬텡은 금세 홍콩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질은 떨어질 지 몰라도 ‘서양 맛’을 싸게 경험할 수 있어서였다. 호텔 레스토랑 갈 돈의 10분의 1만 있으면 스테이크를 썰 수 있었다.
지금도 차찬텡 중에는 ‘氷室’ ‘餐室’ 같은 옛 간판을 달고 손님을 맞는 가게가 적지 않다. 1세대 차찬텡 ‘미도카페(美都餐室‧Mido Cafe)’가 대표적이다. 1950년 야우마테이 틴하우(油麻地天后廟) 사원 맞은편에 개업해 오늘에 이른다. 콜라병처럼 옅은 청색이 도는 유리창부터 타일 하나, 소품 하나에도 세월이 흔적이 묻어 있다.
미도카페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연유와 설탕을 넣은 팥 음료 홍다우뺑(紅豆冰, 50HKD, 약 8600원)과 뜨거운 물에 달걀과 설탕만 넣고 저어 마시는 꽌쒀이까이딴(滾水雞蛋, 22HKD, 약 3700원). 홍다우뺑은 대부분의 차찬텡에서 맛볼 수 있는 인기 메뉴고, 꽌쒀이까이딴은 옛날 차찬텡에서 즐겨 먹던 추억의 음료다.
음료가 나오자 박찬일과 왕육성 두 셰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꽌쒀이까이딴을 보고서는 대체 왜 이런 걸 사 먹느냐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날계란 푼 따뜻한 설탕물을 돈 주고 먹다니. 하나 두 셰프는 이내 컵 바닥까지 싹 비웠다. 호기심만으로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미도카페는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다. 음식이 맛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70년 전 홍콩으로 시간여행을 온 것처럼 옛 정취로 가득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여서 별별 소동이 다 있었나 보다. ‘촬영 금지’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는데, 다들 주인장 몰래 사진을 찍고 갔다. 식당이라기보다 추억을 파는 테마파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