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의 힘

2024-10-22

의사이자 문화인류학자인 김관욱은 최근작 <몸,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에서 인간의 몸이 발명해낸 질환으로 체념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을 소개한다. 이 증상은 몸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극복하려 하기보다 고통을 감수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증상 중 하나가 수면인데, 무려 5년 동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깨어날까. 죽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아니, 수면이 유일한 자기 보호 조치라면 깨어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한 무리의 소녀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흔들고 꼬집는 등 어떤 힘을 가해도 움직임이 없다. 찬 얼음을 몸에 대도 소용이 없고 그 어떤 통증에도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지 않는다. 꾀를 쓴다고 해도 자율신경계의 반응까지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식물인간’ 상태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뇌파 검사 등 모든 정밀 검사에서 소녀들은 완벽하게 정상적인 수면 상태였다. 단지 며칠 동안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수개월에서 길게는 5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물론 수액 공급과 욕창 방지 등의 조치가 있었다).

김관욱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체념증후군이 처음 공식 보고된 시기는 2005년이라고 한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424건의 사례가 보고 되었고 이후 수백건이 추가되었다. 남자 어린이보다 여자 어린이가 더 많았다. 그런데 2015년부터 2016년 사이에 스웨덴에서만 체념증후군 환자가 169명 발생했다. 공통점은 모두 스웨덴의 여러 도시에 거주하던 난민 가족의 자녀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스웨덴 정부로부터 망명을 거부당했다.

이들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의학적 치료가 아니라 난민 신청이 최종 승인된 이후였다. 이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경우 죽은 목숨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체념증후군은 죽음에 맞서는 일종의 몸의 반응이었던 것이다.

자기 보호로서 체념

나는 그의 책을 읽고 우울증 환자들의 수면장애가 생각났다. 잠은 유사 죽음 상태를 취함으로써 신체가 휴식 시간을 갖는 행동이다. 지속적인 생명활동을 위해서는 잠이 필수적이다. 우울증을 앓은 이들 중에는 몹시 피곤한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있지만, 내내 자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체념증후군 환자들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잘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잔다. 성인이 하루에 18시간 이상 자고 간헐적으로 잠이 깨다가 다시 자기를 반복하는 증상이다. 온몸이 피곤하고 잠이 쏟아져 직장을 그만두는 이들도 있다.

우울증은 생명력의 가장 근원적인 의지 기능이 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뇌의 오작동이 일으킨 질병이다. 그래서 우울증을 살아있는 죽음(living dead)이라고도 한다. 완벽한 절망 상태일 때, 죽지는 못하고 죽음과 비슷한 조건인 잠으로 도피(몸이 적응)하는 것이다. 삶, 잠, 죽음은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의지 부재의 상태를, 잠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나 삶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질병(우울증) 앞에서 만사를 체념한 자의 대응이 수면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스웨덴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한 어린이들의 체념증후군이나 일부 우울증 환자의 만성 수면 상태는 몸 스스로의 처방이다. 난민 이슈와 우울증의 공통점은 모두 사회문화적 구조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국가가 국민을 (죽도록) 방치하는 경우나 자본주의의 극한 경쟁 사회에서 몸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많지 않다.

니트족(NEET族,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은 교육을 받지 않고, 일하지 않고, 직업 훈련에도 참여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처음에는 일본에서 고안되었으나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으로 일본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의 탈력(脫力) 문화와 탕핑족(平族,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청년층)이 문제시되고 있다. 생존 전략으로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다. 이들은 기력이 필요한 취업, 연애, 인간관계 심지어 식사까지도 최소한으로 하면서 숨만 쉬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살아남기, 견디기가 곧 저항이 되는 “이불 속에서의 봉기”인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은 이 문제를 가시화하고 사회적 대처와 연구에 큰 관심을 두는 반면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2023년 15~29세 청년층 중 ‘쉬었음(자발적 비취업)’ 인구는 41만명이다. 실제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이들은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데도 경제활동이나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다. 정부는 1조원의 예산을 들여 이들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실효성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작년 통계청의 ‘고용 동향’을 보면 청년층 인구의 약 5%가 쉬었음 인구로 집계됐다. 13년 전인 2010년 초반 전체 청년의 2% 수준이던 쉬었음 인구는 2020년 5%(44만8000명)로 폭증했다.

잠을 많이 자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수면 상태는 몸이 알아서 쉬는 ‘소극적’ 대응이다. 자신이나 남을 해치지 않는다. 이들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 자발적 비취업자들의 일부는 시간을 사용한다. 자발적 비취업 문제 역시 사회 구조의 결과지만, 오랜 실업 상태는 개인적·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비취업 상태에서 취미생활, 운동,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을 하면 좋겠지만, 이들의 시간이 반사회적 활동으로 이어진다면 문제다.

의지의 양극화 시대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 불안형 내셔널리즘의 시대, 한·중·일 젊은이들의 갈등 읽기>의 저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3개국 젊은이들이 몰두하는 국수주의적 온라인 배틀의 실제 원인은 실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내셔널리즘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내셔널리즘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는가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는 개인의 젠더, 연령, 계급, 장애 등에 따라 다르다. 젊은 여성의 실업보다 남성의 실업이 폭력, 보수세력화, 범죄 등 사회문제로 연결될 확률이 높은 현실은 남성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인류를 지배해 온 젠더 구조에 기인한다.

자발적 비취업자들의 상태가 정말 자발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의지도 양극화된 시대다. 경쟁사회는 좋은 조건에서 지나치게 열심히 사는 이들, 즉 이미 승부가 난 게임에서 이긴 이들이 만든 조건이다. 난민(難民), 글자 그대로 자신의 삶이 외부적 조건에 의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다. 수면 상태인 사람도 있고 낮잠으로 밤낮이 바뀌어 밤새 인터넷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모든 상황이 인류가 원하는 인간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경우보다는 조용히 잠을 자는 것이 좀 낫지 않을까라는 ‘체념적’ 생각을 해 본다. 체념은 희망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현실에 적응하는, 일종의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체념증후군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고, ‘스웨덴 정부가 망명 신청을 수용한다면’ 회복될 질환이다.

체념을 문제시하는 것은 경쟁사회의 시각이 아닐까. 권력은 모든 인구가 경쟁사회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승리’를 보장해 줄 ‘패배자, 들러리’가 필요하다. 경쟁사회의 룰은 이미 부정의, 불공평하다. 승패를 전제할 뿐 아니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의지를 찬양하는 사회에서 산업재해나 ‘극단적 선택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회적 타살이 얼마나 많은가.

우울증을 권하는 사회를 탓하지 말고, 차라리 우울을 긍정함으로써 현실을 수용할 때 ‘우울한 사회, 우울한 개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울이 정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 체념과 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야말로 강력한 저항의 수단이다. 경쟁사회에 각자 자기 방식대로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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