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궁예가 尹대통령에게

2025-01-07

‘공정’ 기치로 대권 거머쥐었지만

백성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열광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찰나

헌법 수호할 지도자의 결단 기대

윤회생사(輪廻生死). 짐(朕)이 918년 입적(入寂) 후 구천(九泉)을 떠돌다 1100여년 뒤 태봉(泰封) 땅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며 떠올린 말이다.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처럼, 중생의 번뇌(煩惱)와 미혹(迷惑)은 삶과 죽음은 물론 겁(劫)이란 시간까지 초월해 돌고 도는 업보(業報)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신라왕의 아들로 태어나 분투 끝에 후고구려, 마진 등을 건국한 궁예(857?∼918)다. 10대 때 불가에 귀의한 승려로서, 관심법(觀心法)에 정통한 50대엔 사바세계를 구제하려고 애를 쓴 미륵(彌勒)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악한 마구니(魔仇尼)들과 어리석은 중생은 나를 미치광이 폭군으로 내몰았다.

석가모니께서 일러주신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통찰을 곱씹게 되는 요즘이다. 2022년 봄부터 후삼한(韓國)을 다스린 윤가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나와 그는 몹시 닮았다. 고려 김부식은 짐을 “상벌을 공정하게 하고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평가했고, 2013년 10월 민초는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가에게 열광했다.

과인이 이 같은 자산을 바탕으로 권력의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호족 기훤, 양길의 수하로 9년여를 보낸 뒤 901년 후고구려를 세웠다. 윤가 또한 한국 19대 수반 밑에서 제일검(第一劍)을 자처하다 대권을 거머쥐었다. ‘공평무사(公平無私)한 나라’에 대한 민심의 숙원(宿願)이 현실판 미륵을 소환한 게 아닌가 싶다.

열광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찰나(刹那)이다. ‘사졸과 즐거움과 괴로움, 힘듦과 한가로움을 함께 해 따르는 무리가 마음으로 두려워하면서도 아꼈던 장군’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과인은 폐위 직전까지 “미륵인 나는 달리려고 하는데 너희 똥막대기들이 좇아오지를 못해”, “이 불쌍한 것들을 모조리 우리 속에 집어넣고 태워버리게”를 일삼는 ‘천하의 흉악한 자’(元惡大凶)였다.

현세의 윤가도 과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 그의 집권 초 허언(虛言)은 금세 밑천을 드러냈다. ‘가치외교’와 ‘카르텔 타파’에 대한 비난이 거세자 ‘입틀막과 소송전’, “반국가세력 척결” 등으로 버티더니 급기야 “문짝을 부수고 총을 쏘는” 군사정변(軍事政變)을 일으켰다.

퇴행하는 통치자를 두고 해석은 분분할 수밖에 없다. 가장 속 편한 건 한 서생의 분석대로 ‘그의 목표는 애초부터 침팬지 집단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지나친 비아냥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윤가가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과 나라를 구하려는 책임감을 보여준 적은 별로 없다. 집권 초엔 자신을 뽑은 1400만명을 내세우더니 친위 정변 이후엔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애국시민들” 뒤로 숨어버렸다.

통솔력에 대한 깜냥도 논란거리다. 과인이 각종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장군의 인맥과 지도력을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의 그것으로 확장하지 못했듯 윤가 또한 검객 집단에서 통할 법한 수준과 인식에만 머물렀다. 통치의 소소한 단맛과 근본적인 통솔의 한계와 의지, 실권에 대한 불안, 역사 인식·국가 비전의 부재(不在)로 점차 민심을 등진 우리는 혁명, 탄핵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진언(眞言)컨대 과인을 빼닮은 후손이 유념해야 할 역사적 진실이 있다. 민심이라는 도도한 배는 임금이라는 배를 언제든지 뒤집을 수도 있다. 서구의 한 언관(言官)도 “민심을 잃은 정부와 끔찍한 재난은 위험한 조합”이라고 했다. 자연재해나 민생파탄과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 지나치게 무능하거나 이기적이어서 백성의 요구·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부(지도자)는 전복될 수밖에 없다.

철권통치를 한 폭군의 말로(末路)는 동서고금 엇비슷하다. 신통력이 대단했던 과인 역시 “미복 차림으로 산림으로 도망쳤다가 곧 백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절대군주였던 과인의 사정도 이럴진대 하물며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는 공복(公僕)의 대표자 윤가의 운명은 어떨까. 미생(未生)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한다.

송민섭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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