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전환시대의 논리>는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 준 책이다. 2006년 개정판 서문에서 리영희 선생은 “피를 먹고 싹을 튼 한국의 민주주의 나무는 그 앞날이 결코 순탄치는 않겠지만 힘 있게 자라서 넓은 번영의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왜냐하면 수십만을 헤아리는 전국의 ‘전론’의 사상·정신적 제자들이 사회와 나라의 주인으로 자랐기 때문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서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한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지난해 12월3일 밤 느닷없이 선포된 비상계엄에 대응하여 국회는 바로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을 의결했다. 즉시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지만, 국회는 이번 사태를 초래한 원인을 꼼꼼히 따져 근본적인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도대체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까? 대통령은 정부 관료에 대한 탄핵소추와 민주당의 예산삭감, 반국가세력 척결을 비상계엄 선포의 사유로 제시했지만, 대통령 일가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정부 정책의 이면에 가려진 이해관계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가 권력을 낳고 권력이 부를 키우는 상황에서는 정치 과정을 통한 지대추구행위가 치열해지고, 국가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삼권분립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지만,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견제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경제가 경세제민, 즉 ‘세상을 잘 다스리고 백성의 생활을 돕는다’는 사자성어에서 유래된 것도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폭정에 대한 우려와 경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경제는 ‘모방과 추격’의 성장전략이 한계에 이르고,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불거진 양극화와 불평등이 내수기반을 침식하면서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치 1.8%는 잠재성장률 2%를 밑돌고, 순자산 지니계수는 2017년 0.584에서 2024년 0.612로 증가하여 불평등이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2022년 가구 처분가능소득 지니계수는 0.324로 OECD 31개 회원국 가운데 13번째로 높지만, 재정의 불평등 감소 효과는 4번째로 작고, 그마저도 2020년 이후에는 축소되고 있다.
불평등한 분배구조는 내수기반을 위축시키고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저해하며, 계층 간 사회 이동성을 제약하여 성장잠재력은 물론 다수 국민의 행복감을 떨어뜨린다. 2023년 GDP 규모는 세계 14위를 기록했지만, 행복지수는 50위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각자도생과 승자독식의 시장경제에서 전개되는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삶이 고달프고 힘들기 때문이다. 노인빈곤율과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 출생률이 낮은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정부는 낙수효과에 기대어 재정을 소극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초저출생, 4차 산업혁명, 기후위기,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에 직면한 한국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민주화를 실현해야 한다. 미완의 경제민주화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경제의 선진화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는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면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경제질서를 경제 헌법의 지도원칙으로 표명하고 있다. 특히 2항(일명 경제민주화 조항)은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안정, 적정한 소득분배,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방지, 경제주체 간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국가의 책무로 명시하고 있다.
국민경제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선 투자국가로서 역할을 강화하고 혁신의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적정한 소득분배를 위해선 공정과세, 서민·중산층에 대한 재정지원 확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해소, 참여예산제도 확대와 선거제도의 대표성 강화 등이 필요하다.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선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행위를 근절하고 불합리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정부는 ‘대내외 불확실성 확대에 대응한 경제의 안정적 관리’를 2025년 경제정책 목표로 제시했지만, 여전히 감세 기조하에서 정책금융과 규제 완화에 치중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경제의 구조전환이 절실한 시점이고, 대전환기의 경제개혁은 경제민주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