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에서] ‘산불 수급불안론’을 경계한다

2025-04-01

온 나라가 영남 대형 산불로 애면글면 발을 굴렀던 3월28일 오후 한국물가협회가 3쪽짜리 보도자료를 냈다. ‘경북·경남 주산지 작물 사과·마늘·양파 가격 강세 지속, 수급 차질 불가피’란 제목의 이 자료는 컬러 원그래프를 동원해 경북·경남 농산물 상위 10개 품목 생산량 비율을 상세히 소개했다.

특히 사과와 관련해 협회는 “경북 청송·안동·의성·영주·문경 등은 국내 사과 주산지로 이번 산불 피해에 따른 수확량 감소가 우려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2023년부터 이상고온 현상으로 낙과 및 열과 피해가 발생하며 상품성 저하와 가격 강세가 지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의미심장한 건 마지막쪽 글귀였다. “주요 산지에서 발생한 산불과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사과·마늘·양파를 비롯한 농산물 전반의 가격 강세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정부의 수급조절, 비축 물량 운용, 수입 탄력 조정 등 정책적 대응이 시장 안정을 위한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입 탄력 조정.’ 오전의 찜찜함이 탄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날 아침 기획재정부 제1차관 주재로 열린 ‘물가관계 차관회의’에서 김범석 기재부 차관은 “정부는 범부처 공동으로 국민 생활과 밀접한 먹거리 가격 안정을 위해 총력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일부 석간 일간지는 김 차관의 발언을 인용해 “산불에 초토화된 사과·마늘·송이 주산지…농산물 수급 우려 커져”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물가협회는 ‘기재부 허가 전문가격조사기관’이다. 김 차관의 발언과 물가협회의 갑작스러운 자료 발표, 이어지는 언론 보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2023년산 ‘금(金)사과’를 다룬 일부 여론과 언론, 정부의 행태가 떠올랐다.

2023년산 사과는 병충해 등의 여파로 생산량이 전년 대비 30.3% 감소하면서 가격이 치솟았다. 4월 총선과 9월 추석이 맞물리면서 여론은 악화했고 언론은 기름을 부었다. 미국·뉴질랜드·일본산 사과 수입을 정부가 추진했네 안했네 하는 말들이 오갔고 기재부가 농림축산식품부에 외국산 사과 검역을 우선순위에 둘 것을 요청했느니 말았느니 하는 발언이 난무했다.

그러는 사이 미국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섰고 올 3월 중순 미 무역대표부(USTR)가 취합한 업계 의견서가 공개되면서 미국산 사과는 또 한번 농민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미 북서부원예협의회(NHC)는 “식물 위생 우려로 (미국) 북서부 사과·배의 수입을 (한국이) 거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USTR은 조만간 ‘2025년 국별 무역장벽 보고서(NTE)’를 내놓을 것이고 사과시장 개방 공세는 2018년 이후 8년째 계속될 공산이 크다.

한국은 사과를 선물로 주고받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사과가 과수계의 쌀이요, 나무로 치면 국민 수종 소나무격인 이유다. 2022년 기준 과수 생산액 5조8000억원 중 사과는 단일 품목으로 23%(1조3430억원)를 넘는다. 지난해 경북지역 사과 생산량은 28만6000t으로, 전국(46만t)의 62.2%였다.

이같은 경북의 위상은 ‘국내 사과 60% 생산했는데…안동·청송 초토화’로 마치 경북 사과밭 전체가 피해를 본 것처럼 호도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경북도가 가집계한 피해규모가 지역 재배면적의 5%, 전국의 1%에 그친다는 농식품부 해명을 부디 믿고 싶은 건 비단 나뿐일까. 산불에 따른 사과 수급에 대한 지나친 우려가 자칫 외국산 사과 수입 빌미로 작용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김소영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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