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언덕에서 펼쳐지는 초현실주의 놀이

2025-01-06

뉴욕 월스트리트의 한 변호사 사무실. 신입 필경사 ‘바틀비’는 서류를 검토하라는 변호사의 지시에 아주 부드럽고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한 대목이다. 아주 성실해 보였던 필경사 바틀비가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 본연의 업무를 ‘단호하게’ 거부하자 변호사는 어떻게 직원을 다루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다. 월급을 올려 달라는 뻔한 항의의 표시가 아니었기에 변호사는 당황할 수밖에. 기존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는 바틀비의 말과 행동은 체제에 깊게 편입된 우리에게 당혹스러운 상대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필경사 바틀비와 비슷한 인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 그리고 다른 예술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초현실주의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산모를 쓴 신사,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의 ‘만우절’ 시리즈에 나오는 고깔모자를 쓴 광대,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 나는 이 이름들의 목록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오는 3월 1일까지 서울 회현동 ‘피크닉’에서 열리는 사진전 <우에다 쇼지 모래극장>의 작가 ‘우에다 쇼지’(1913-2000)다.

사진전 곳곳에 등장하는 우에다 쇼지의 자화상은 르네 마그리트의 중산모 신사와 찰리 채플린이 뒤섞인 인상이다. 셋 다 실크해트와 검은 양복을 입었으며 지팡이 내지는 우산을 들고 다닌다. 그리고 셋 다 기존의 룰을 벗어났다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마그리트의 중산모 신사는 초현실주의적인 인물이고, 찰리 채플린은 사회 부적응자다. 우에다 쇼지는 좀 특이한 부적응자다. 예술적 재능은 충분한데 일부러 메인스트림에 진출하지 않고 고향 돗토리현에 머물며 자기만의 스타일대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아마추어 사진가라 불렀단다.

“도쿄에서는 팔리는 사진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됐다. 도쿄에 진출했다면 나도 여성 누드와 광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빨리 망쳐버렸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에 머무르면서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쿄로부터 한 발짝 물러섰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돗토리현의 한 모래언덕으로 한 무리의 인간들이 개미처럼 줄을 지어 올라가고 있다. 레디 큐! 배우들은 죄다 아마추어다. 하지만 감독 중에는 우리가 아는 프로의 이름이 적혀 있다. 훗날 일본의 제일가는 사진상의 타이틀이 된 ‘도몬 켄’과 ‘미도리카 요이치’. 아마추어 감독인 우에다 쇼지는 이들의 작업도 사진에 담는다. 아마추어답게 사진의 문법이 자유롭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사진 구도. 중심은 텅 비어있고, 인물들의 포즈에는 어떤 통일성도 찾아볼 수 없다.

‘부조리한’ 연극의 한 무대라고 말하기도 온당치 않다. ‘부조리’라는 말은 ‘조리’(이치)를 충분히 알고 있는 교양인이 쓰는 고급스러운 문법이기 때문.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무엘 베케트’처럼 기존의 질서에 반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저 감각이 이끄는 대로 모델을 배치하고 사진에 담았을 뿐이다. 그런데 결과물이 놀랍다. 우리는 이 독특한 미장센을 보며 다른 학구적인 설명을 덧붙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 하나 있다. ‘우에다조Ueda-cho’! 우에다만의 스타일이라는 뜻이다.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우에다조는 ‘초현실주의 놀이’다. 사진에 찍힌 인물들이 현실적인 맥락을 상실했기에 초현실주의적이다. 원근감이 없다는 점도 그러한 느낌을 강조한다. 여기에 ‘놀이’라는 단어를 추가해야 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대입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처럼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쾌하다. 그럴만한 사정도 있다. 그 당시에 모래언덕에 올라 연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려면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놀 만한 배짱도 필요했을 터다. 우에다 쇼지가 모래극장을 찍었을 때는 사진이 ‘음주와 도박, 여자’에 이어 돈이 많이 드는 놀이로 불리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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