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12월 3월 불법적인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올 상반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적 대혼란은 과학기술·외교 현장에도 뚜렷한 악영향을 남겼다. 갑작스러운 계엄 사태부터 대통령 탄핵까지 약 6개월간의 국가 리더십 공백은 전방위적인 국가 전략 결정의 지연과 국제사회에서 협상력 약화로 이어졌다. 특히 미국과의 관세·기술·투자 협상에서 사실상 정부 리더십의 공백으로 인해 민관 모두 허둥지둥대야 했다. 오히려 미국 측에서 우리 측의 명확한 정책 방향과 일관된 리더십 부족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 결과, 우리 당국은 상대국과의 세부 조건 타결에 있어 정책 우선순위의 혼선과 책임소재의 불분명함을 노출했고 기업들은 대외 투자·협력 계획 재조정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올 5월 10일 새 정부가 출범하며 정치적 리더십 부재 사태에 종지부를 찍은 뒤 우여곡절 끝에 한미 협상을 타결지었으나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담은 여전히 만만찮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국가 리더십 표류에 대한 안타까운 경험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지금 세계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을 둘러싼 사실상의 기술패권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이 전쟁의 승패는 예산의 규모보다 ‘결정의 속도’와 ‘리더십의 선명성’에서 갈린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에도 국가 연구개발(R&D)의 중추인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의 기관장 공백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과학기술 경쟁력 상승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기초과학연구원(IBS)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한 핵심 연구기관에서 사실상 전략적 의사결정이 멈춰선 것이다. 연구원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항로를 결정할 선장이 사실상 없어 비전과 방향, 전략을 놓고 혼선이 초래되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한국에너지공대(2023년 12월), 한국한의학연구원(2024년 4월), 기초과학연구원(2024년 11월), 한국뇌연구원(2024년 12월), KAIST(지난 2월), 국가녹색기술연구소(올해 11월)의 장이 이미 임기가 만료됐다. 이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시작으로 다음달 한국전기연구원, 내년 3월 한국화학연구원의 장도 임기가 만료된다. IBS의 경우 2019년 취임한 노도영 원장이 작년 11월 임기 만료 후 1년 넘게 후임자 인선을 기다리다가 절차가 진행되지 않자 지난달 사표를 내고 광주과학기술원(GIST)으로 복귀했다. KAIST의 경우에도 지난 3월 3배수로 차기 총장 후보를 선출한 이후 모든 절차가 중단된 상태인데 이사진(15명) 중 내년 2월 5명, 내년 5월 2명의 이사 임기가 종료될 예정이어서 조속한 결정이 요구된다.
기초과학연구원과 KAIST 등은 단순한 연구기관이나 대학이 아니다. 국가 R&D 생태계의 중심축이자 기초 연구와 산업 응용을 잇는 전략적 허브다. 그럼에도 이들 기관의 리더십이 공백 상태로 방치되면서 중장기 연구 방향 설정, 대형 과제 결정, 국제 협력의 최종 판단이 지연되고 있다. 연구는 진행되지만 어디로 가는지 명확하지 않고, 결정은 쌓이지만 책임질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학계와 협력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 이러한 리더십 부재는 치명적이다. 수년간 공들여 준비한 산학 공동 연구가 기관장의 부재로 최종 승인 단계에서 멈춰서고 새로운 대형 과제는 책임질 주체가 없다는 이유로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기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 시장에서 과감한 투자를 결정해야 하지만, 파트너 기관의 리더십이 비어 있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리스크도 감당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한 행정 지연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기술 축적 시간을 갉아먹는 손실로 돌아올 것이다.
정부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계엄 사태를 통해 국가 리더십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렀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기회가 허공으로 사라졌는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하다. 국가 핵심 R&D 기관의 수장 공백은 행정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기관장 임명은 단순한 ‘자리 채우기’가 아니라 멈춰 선 국가 경쟁력의 시계를 다시 돌리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시간이 축적되어야 성과가 나지만 그 시작과 끝에는 반드시 책임 있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리더십의 부재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과학기술계만큼은 같은 실수가 반복돼선 안 된다. 새 정부 출범 6개월이 넘은 시점에서 연구기관과 대학의 리더십을 조속히 정상화하고 산학연정이 뭉쳐서 뛰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어찌보면 가장 시급한 국가 전략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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