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인의 신조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4-09-24

‘하면 된다’라는 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집권한 1960년대 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수탈을 당한 것으로 모자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3년간 전쟁까지 치렀으니 당연한 결과다. 경제 발전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대통령이 국민을 일으켜 세워 열심히 일하게 만들려면 ‘하면 된다’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발신하는 게 불가피했을 것이다. 덕분에 한국은 1960∼1970년대 고도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면 된다’를 뒤집은 듯한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도 있다. 1958년 창설된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정신이자 신조다. 한국을 대표하는 특수 부대인 특전사 요원의 상징은 검은 베레모다. 이를 제목으로 한 ‘검은 베레모’라는 군가에는 “안되면 되게 하라 / 특전 부대 용사들”이란 구절이 있다. 특전사 예하 제1, 7, 11, 13공수여단 여단가의 가사에도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하긴, 치열한 전쟁 도중 적진에 몰래 침투해 비밀 작전을 펼쳐야 하는 특전사 요원들로선 안되면 무조건 되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비결일 것이다.

옛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하급자를 향해 “이봐, 해봤어”라고 질문을 던진 것으로 유명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거나 추진하는 단계에서 부정적 의견이 제시되면 입버릇처럼 한 말이라고 한다. 즉 “해봤어”에는 ‘안 해본 상태에서 멋대로 판단하지 말고 일단 해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또한 ‘하면 된다’ 또는 ‘안되면 되게 하라’와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어느 직장에서나 부하에게 뭔 일을 시킬 때 “그건 어렵겠는데요”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보다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하는 이가 더 신임을 얻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삼성전자가 ‘반도체인(人)의 신조’를 새롭게 제정한다는 사실이 23일 전해져 눈길을 끈다. 이는 1983년 삼성전자가 최초로 자체 메모리 반도체 개발에 도전할 당시 임직원들의 정신 무장을 위해 만든 10가지 다짐으로, 그 첫번째 항목이 바로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라’이다. 그 외에도 ‘큰 목표를 가져라’,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져라’,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 등 덕목이 있다. 삼성전자 측은 “반도체 기술과 시장이 급변함에 따라 시대의 변화에 맞는 혁신이 필요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세상이 시시각각 바뀌는 만큼 과거 신줏단지처럼 받든 행동 강령이라도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갈아치우는 게 당연할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란 지각변동 속에서 삼성전자가 느끼는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깨닫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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