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의 하늘은 한없이 높고 파랬다. 서른둘, 청년 안중근 의사(1879~1910)가 품었던 높고 푸른 꿈처럼.
지난주 중국 만주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가 해방 80주년을 맞아, 뤼순에서 하얼빈까지 독립운동의 영웅 안중근 의사 의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열강들의 제국주의 야욕이 부딪쳤던 만주라는 격변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뜻깊은 일정이었다.
우리는 안 의사를 한국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하지만, 안 의사에겐 오랫동안 구상해온 ‘동양평화’라는 큰 뜻이 있었다. 이토 저격은 그 뜻이 표출된 단면일 뿐, 안 의사의 시선은 훨씬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안 의사가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3월26일 순국 직전까지 뤼순 감옥에서 몰두한 일은 ‘동양평화론’ 집필이었다. 당시 뤼순 법원의 최고책임자인 고등법원장은 안 의사가 상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동양평화론 집필을 끝낼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서문·전감·현상·복선·문답 등 5개 장으로 구상했던 책은, 일본이 사형 집행을 서두르는 바람에 서문과 전감 일부까지만 쓰였다. 나머지 부분은 당시 일본 법관과 안 의사의 면담 내용을 기록한 ‘청취서’ 등으로 유추해 구성됐다.
동양평화론은 한마디로, 날로 서양세력이 뻗쳐오는 상황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대등한 국가로 주권을 인정하고, 동등하게 협력하자는 제안이다. 하얼빈 의거가 동양평화를 위한 것임과, 집필 목적이 일본의 침략정책을 수정하도록 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제시했다. 뤼순 중립지대화와 한·중·일 3국 대표로 협력기구 설치, 한·중·일 3국 공동 은행·화폐 도입, 3국 군사협력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는 유럽연합(EU) 형태의 평화체제 구상으로, 시대를 앞서간, 선구적인 역사적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 의사 집안은 황해도 해주 지역의 명문가였다. 무인 계통의 지역 향리 집안으로 풍족한 경제력에, 똑똑하고 용감한 인재도 많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었지만 고생을 자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안 의사의 아버지부터 3대에 걸쳐 독립운동 과정 곳곳에 집안 전체가 헌신했지만,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안 의사 의거 이후 가해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가혹했지만, 의사의 두 동생과 사촌, 여러 명의 조카 등 일족이 해외로 망명,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항일투쟁에 나섰다.
“안 의사 가문에서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분이 몇명인지 아십니까? 제가 알기론 최소 15명입니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뼈대 있는 가문은 안중근 가문이어야 합니다. 유명한 명예교수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그 글에 아내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말이 나와요. ‘우리 시아버지가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면서 자랑하더라는 것인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랑하는 이 말을 듣고 굉장히 한심했다는 교수님의 얘기였어요. 중추원 참의가 뭡니까. 일본에서 작위를 받은 사람들로,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는 최상위 특권층의 상징이었고, 확실한 친일의 증거인데 이걸 자랑했다는 말이죠.”
답사 동행해설을 한 신주백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의 설명에, 답사단 곳곳에서 작은 한숨이 이어졌다.
현재라고 다를까. 책임감보다는 권력의 단맛만 탐하는 이들이 창피함도 모르고 우리 사회의 상위층을 구성하며 이를 자랑하고 있진 않을까.
역사학자 백암 박은식은 저서 <안중근전>에서 안 의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안중근을 역사에만 근거하여 평가할 때 어떤 사람은 그를 몸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라 하였고, 또는 한국을 위해 복수한 열렬한 협객이라고도 하였다. 나는 이런 찬사에 그친다면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근은 세계적 안광을 가지고 평화의 대표를 자임하던 사람이다. 중근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이토를 평화의 공적으로, 그 괴수로 그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하리라 여겼기에 자기의 목숨을 던져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을 무상의 행복으로 생각했다.”
지역 내 세력 균형과 다자간 통합을 골자로 한 동양평화론. 갈등을 조정하는 외교적 노력과 공존과 공영의 가치를 꿰뚫어본 안 의사의 혜안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난다. 안 의사가 죽는 순간까지 알리고자 했던 동양평화의 의미를 기억하고, 한국이 상상력과 역량을 발휘해 평화적인 공영의 길을 주도하는 일이야말로 안 의사가 천국에서도 춤출, 해방 80주년의 후손 된 도리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