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큐레이션, 홍보

2025-03-04

작가와 편집자는 책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창작자이고 후자는 제작자지만, 둘 다 소유권과 출판권을 가지며 판매 활동을 하므로 생산자라 할 수 있다. 저자와 편집자들은 외부 의뢰에 응해 종종 큐레이션 역할도 한다. 큐레이션은 질적 평가와 함께 위계를 짓는 행위다. 요즘 편집자들은 선두 독자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는데, 외부 기관의 출판물 심사위원, 올해의 책/세기의 책 선정위원, 휴가 때 읽을 책 추천인에 곧잘 포함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집자의 본래 포지션은 본인이 소속된 회사의 책을 만들어 파는 것이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런 정체성은 더 강화되고 있다.

추천을 홍보처럼 하는 건 무례

타인의 미래 추동하는 힘 되기도

기준 수직적이고 엄격히 세워야

점점 더 마케터 성향을 띠어가는 편집자는 따라서 책 가까이에 있고 다독한다는 이유로 큐레이션에 참여하는 순간 사적 이익이 스며든 오염의 흔적을 여기저기 남길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한 출판사에 속한 편집자이지만 최고의 책을 꼽아달라는 기획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이런 기획을 담당하는 이들은 의외로 선정 기준의 세부 규칙을 제시하지 않는데, 그건 추천인 스스로 공정성과 균형감을 가다듬을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여자 가운데 꽤 여러 명이 자신이 만든 책(혹은 쓰거나 옮긴 책)을 최종 리스트에 포함시킨다. 이것은 목록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첫째, 전체를 아우르려는 시도가 엿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에 대해 반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몇 권 안 되는 목록에 본인 책을 넣는 것은 다른 수많은 책에 대해 무지하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무지를 밀고 나가기에는 책의 본질이 ‘앎’에 있기 때문에 큰 충돌을 일으킨다. 이것은 지형을 읽는 능력과 독서력의 부족이라고 할 수도 있고, 리서치를 게을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책은 정독해야 추천할 수 있기에 언뜻 리서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추천인은 늘 공시적(共時的) 흐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비슷한 부류의 책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대표성을 부여하는 일인데, 이럴 때는 어떤 책이 객관적 위상을 더 오래 유지할 자질을 지녔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둘째, 기준과 윤리성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 추천은 홍보가 아니다. 나는 나를 최고라고 말할 수 없다. 이건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으로, 그 스스로가 규칙을 세울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타자가 없는 나르시시트에게는 윤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앞선 책들의 저자에게 빚을 갚아야 함에도 종종 자신의 욕망을 싼값에 넘기며, 이로써 상대에게 가볍게 무례를 범하곤 한다.

평가, 선정, 추천은 갖은 애를 써야 가까스로 공정성과 객관성에 근접한다. 어떤 종류의 책 선정이든 거기에는 심사자의 선입견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철학책은 읽지만 문학은 안 보는 사람이 내 주변에는 꽤 있는데 이들은 문학보다 철학이나 과학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 나름의 엄밀한 잣대일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이뤄낸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 개념은 너무나 대단해 1930년대 중반에 그가 ‘흑인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철학자 그랜트 파레드는 『마르틴 하이데거, 내 인생을 구하다』라는 책을 펴냈을 정도다. 하지만 횔덜린이나 한강이 보여주는 문학의 감정은 심혼의 가장 깊은 곳을 탐구하며, 시화된 것 속에서 정신적 질서와 직관적 질서의 통합을 이뤄내므로 철학이 우위라는 것은 언어와 서사에 대한 오해라고 반박당할 여지가 있다.

지난 1년, 혹은 이번 세기 들어 출간된 도서 가운데 무엇이 최고냐고 묻는 것은 곧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사유하라는 요구다. 추천인이 이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즉각 다른 사람의 미래가 된다. 즉 어떤 사람의 과거/역사는 다른 이의 장래를 추동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질문은 단지 답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며 ‘확장’을 요구한다. 만약 뻗어나가거나 높이 튀어오르려고 묻는데 여기에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나 좁은 소견만을 드러낸다면 이는 질문을 근본부터 훼손하는 행위다.

책은 이름을 걸고 쓴다. 책에서 저자의 이름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데, 그건 저자가 앞선 작가들의 어깨를 딛고 이를 넘어서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소셜미디어로 인해 이름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졌고, 저자는 판매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담당 편집자 역시 마케터가 되어 그걸 돕는 한편, 가끔 큐레이션을 해야 할 때조차 자기 욕망의 굴절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다. 큐레이션 하는 사람은 뒤를 보면서 동시에 앞을 봐야 한다. 자신의 과거가 독자의 미래에 떠안겨졌을 때 기만이라고 여겨지지 않으려면 기준은 더 엄격하고 더 수직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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