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넣고 간절하게 드르륵…2030 여성 '동그란 캡슐' 열광 왜 [비크닉]

2024-12-21

b.트렌드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동그란 플라스틱 캡슐이 가득 담긴 기계에 동전 하나를 넣습니다. 원하는 상품이 나오길 간절하게 기도하며 손잡이를 돌립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투입구로 떨어지는 캡슐. 안쪽을 확인해 원하던 결과면 기쁨의 환호성을, 아니라면 실망과 한숨으로 또 다른 동전을 준비합니다.

최근 홍대∙강남역 주요 상권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바로 ‘가챠’숍입니다. 가챠는 ‘철컥철컥’을 뜻하는 일본어 의성어로, ‘뽑기’같은 경품 기계를 말하는데요. 요즘엔 가족 단위 손님이 많은 롯데타워나 스타필드 등 대형 쇼핑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9월에는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 국내 최대 규모로 ‘가챠파크’까지 들어섰는데, 입점 한 달 만에 매출 2억원을 기록했다고 해요.

대체 가챠가 어떤 매력이 있길래 대형 쇼핑몰 공간까지 차지한 걸까요. 오늘 비크닉에서는 가챠가 새로운 놀이 문화로 자리잡기까지의 배경과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해요. 이를 위해 먼저 가챠의 본거지이자 수출국인 일본의 상황을 짚어볼게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 가챠 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도 함께 엿보겠습니다.

미국 무인자판기가 원조…가챠 산업 꽃 피운 건 일본

사실 가챠의 원조는 1880년대 미국 뉴욕에서 등장한 껌∙사탕 무인판매기입니다. 이후 장난감까지 들어가며 어린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죠. 그런데 기계 앞에서 떼쓰는 아이를 달래는 일이 생겨나면서 부모들은 이를 ‘셧업토이(Shut up Toy)’라 불렀다고 해요. 당시 장난감을 납품하던 일본 회사는 흥행을 예감하고, 아예 무인판매기를 장난감 뽑기용으로 만들어 일본에 퍼뜨립니다. 1965년, 가챠가 하나의 문화 산업이 되는 역사의 시작인 거죠. 예상대로 구멍가게 앞에 설치된 가챠는 동심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행운을 기대하는 희열을 느끼는 데다, 친구들을 만나는 교류의 장이 됐기 때문이죠.

과거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였던 가챠는 이제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일본완구협회는 지난해 6월 ‘도쿄 장난감쇼 2023’에서 2022년 캡슐토이 시장이 역대 최대치인 610억엔(약 65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어요. 일본 전역에 가챠기계가 설치된 장소는 7만여 곳으로, 편의점 수(약 5만7000개)보다 많습니다. 편의점의 왕국이라 여겨졌던 일본이 사실 가챠의 왕국이었던 셈이죠.

일본 가챠 산업에서 30년간 몸담은 오노오 가쓰히코 일본가챠협회장은 가챠 흥행의 원인으로 ‘설렘’이라는 감정을 꼽습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두근거림과 내 손을 움직여서 목표로 하는 상품을 획득하는 즐거움이 소비 심리를 자극한다는 거죠.

오타쿠 세계 벗어나자 생긴 일…젊은 여성이 가챠 큰 손

일본 가챠 시장이 2010년대에 접어들며 급성장한 배경엔 달라진 소비층에 있습니다. 예전과 달리 지금 일본 가챠 시장을 이끄는 건 2030 여성. 이들이 현재 가챠 소비의 70%를 차지합니다. 일본의 게임유통사 ‘해피넷’은 성인 여성 절반 이상(20대 51.9%, 30대 50.3%)이 어른이 된 뒤 가챠를 구매했다는 조사를 발표하기도 했죠(2023년 ‘캡슐토이 성인 수요 실태조사’).

상품 구성의 다양화도 여성들이 가챠에 열광하는 이유입니다. 시작은 2012년 등장한 ‘컵 위의 후치코’ 시리즈였습니다. 귀여운 매력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후치코는 2000만개나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죠. 과거엔 반다이∙타카라토미아츠 같은 대형 완구사가 만든 울트라맨∙디즈니 같은 유명 애니메이션 IP로 만든 가챠가 대부분이었는데, 젊은 크리에이터와 신생 업체가 만든 오리지널 콘텐트의 인기가 가챠 시장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습니다. 덕분에 일본에선 매달 신상품 300여개, 연간 약 2억2000만개 가챠가 쏟아지고 있죠.

문방구 ‘뽑기’ 경험한 MZ, 구매력 바탕으로 추억 회상

그렇다면 한국의 가챠 시장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국에 가챠가 등장한 건 무려 40년 전인 198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영우 티아츠코리아 부사장(타카라토미아츠코리아 운영사)은 “당시 ‘우세양행’이라는 회사가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오며 한국에 뽑기 문화가 시작됐다”고 전합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뽑기 기계가 문방구 앞에 하나둘씩 놓이면서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죠.

그러다 일본 완구 기업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건 2000년대 초반입니다. 당시 비디오대여점이나 레스토랑·영화관 등에 남는 공간 한쪽을 차지하며 가챠는 친숙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죠. 한국 가챠 시장 역시 서서히 커지더니 최근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업계에선 올해 국내 가챠 시장 규모를 약 300억원, 내년엔 4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한국 가챠 흥행 이유 역시 일본과 유사합니다. 바로 젊은 여성 소비층 덕분이죠. 한국 시장을 독점하는 반다이남노∙타카라토미아츠는 “2030 여성이 가챠 주요 소비층”이라고 전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 이후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일어난 일본 여행 붐도 원인입니다. 김 부사장은 “일본 여행 중 가챠 문화를 접한 젊은 세대가 한국에 와서도 가챠를 즐기려는 모습을 띤다”고 말했죠.

앞으로 한국 가챠 시장은 점점 커질 것으로 예상해요. 한국 가챠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타카라토미아츠코리아의 가챠 수입량은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 40% 늘었고, 내년 1분기 발주액은 전년 대비 120% 증가했다고 해요. 이마이 하루나 반다이남노코리아 마케팅 담당자 역시 “한국인 1인당 구매 개수가 일본인보다 많아 앞으로 한국 시장이 일본만큼 성장할 가능성 있다고 인식한다”고 전했습니다.

구석에서 주류로 자리매김…한국서도 새로운 시도

최근 일본에선 가챠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를 돕는 기부 가챠 기계가 등장하는가 하면, 일본 각지에 로컬 이야기를 담은 ‘지역 가챠’를 특산품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죠. 현지에서만 손에 넣을 수 있는 특별한 굿즈로 지역 관광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거죠. 특정 공간에서 단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는 세계관을 형성해 소비를 이끄는 겁니다.

한국 시장도 새로운 가챠 트렌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글로벌에서 빵빵이 등 국내 인기 캐릭터부터 케이팝 아이돌을 활용한 가챠 수요가 늘었거든요. 김 부사장은 “그동안 일본에서 가챠 문화를 일방적으로 들여왔는데, 이제는 국내 자체 콘텐트로 우리가 문화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했죠.

과거 가챠는 구석진 공간을 채우는 용도였습니다. 하지만 가챠 전문점을 비롯해 대형 쇼핑몰의 공간까지 차지하며 지금은 당당히 주류 장난감 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자투리 공간 장사’에서 무심코 무언가 구매하는 즐거움을 주는 ‘경험 소비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 한국의 가챠 산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일본과는 다른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비크닉’ 유튜브 채널의 ‘B사이드’에선 가챠의 역사와 가챠 트렌드 속 숨겨진 이야기도 다뤄봅니다. 음모론적인 질문으로 브랜드의 의도를 파헤쳐 봅니다.

서혜빈 기자 seo.hyebin@joongang.co.kr, 유충민·장우린PD, 노영주·이지수 인턴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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