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하는 외국어…우리말로 쉽고 바르게

2024-10-08

쉬운 말을 쓰자. 이것이 우리말글 지키기 운동의 큰 원칙이다. ‘금일’보다는 ‘오늘’, ‘화폐’보다는 ‘돈’을 쓰자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른 낱말들은 글말보다 입말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더 자주, 더 널리 쓰인다. 영어식 외래어도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근대주의’ 또는 ‘후기 근대주의’로 바꿀 수 있고 ‘페미니즘’은 ‘여성주의’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이 경우는 외래어보다 번역어가 더 쉽게 이해된다.

이런 쉬운 말 쓰기에 대해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두 낱말이 서로 미세하게 뜻이 다르다고 보면 이 두 낱말은 바꾸어 쓸 수 없다. 모든 면에서 똑같은 두 표현은 없다. 쉬운 말 쓰기라는 원칙에 동의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어휘를 바꾸어 쓸 수 있느냐에 대한 판단은 제법 차이가 날 수 있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보고 33인 중 한 사람인 오세창은 요즘 젊은이들은 한문을 너무 모른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생존권의 박탈됨’을 ‘생존권의 剝喪(박상)됨’으로 고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박상’과 ‘박탈’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오세창은 ‘박상’은 전부 빼앗은 것이고, ‘박탈’은 그냥 빼앗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생존권의 박탈됨’도 전부를 빼앗겼다는 뜻이 있을 수도 있다. ‘박탈’과 ‘박상’은 같지만 다른 점도 있다. 낱말 뜻은 문맥에 따라서 유동적이다. 완벽하게 같은 두 낱말이 어디 있으랴. 그렇지만 ‘박상’보다 ‘박탈’이 자주 쓰이는 말이라 더 쉽다.

두 낱말들 사이의 정확한 뜻 구별이 문제되는 경우는 흔하다. 최근에 명품 ‘백’과 명품 ‘파우치’의 차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백’은 ‘파우치’보다 자주 쓰인다. ‘박상’과 ‘박탈’, ‘백’과 ‘파우치’ 사이의 미세한 뜻 차이와 구별에 관심을 쏟다 보면 자칫 외국어 숭배의 늪으로 빠지게 될 가능성이 있다. 또 소통의 경제성과 폭을 줄이게 된다. 두 낱말 사이의 정확한 뜻같음은 신화다. 과감하게 낡은 한자 어휘, 새로 들여오는 영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탈’과 ‘박상’ 사이, ‘백’과 ‘파우치’ 사이의 차이를 두고 논란을 벌이면서 ‘빼앗김’과 ‘가방’이란 쉬운 말을 그만큼 덜 쓰게 된다.

사전 연구가인 정제도님의 조사에 따르면 편지를 나타내는 어휘가 무려 200개나 된다. 이런 현상이 바람직할까? 복잡함 또는 혼란이며 소통에 걸림돌이 된다. 어휘의 풍부함이 봉건질서의 위계를 반영할 때가 많다. 죽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붕, 흉, 졸, 불록, 사’(<예기> 곡례편) 등으로 여러 낱말을 썼다. 어휘의 풍부함을 지배하는 원동력은 차별을 드러내고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의지이다.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다. ‘말을 쉽게’라는 원칙은 민주주의에도 꼭 필요하다. 들여온 외래어들 사이의 정확한 구별은 이제 무시하기로 하자.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도 독립선언서를 현대말로 고치면서 ‘박상됨’을 ‘빼앗긴’으로 바꾸어 썼다. 앞으로 우리 헌법도 술술 읽히게 다듬어야 하고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같은 역사적 성명서도 풀어 써야 하리라 본다.

자주 안 쓰이는 한자말을 우리말 사전에서 빼고 영어 함부로 쓰기를 삼가자. 그렇다고 우리말 어휘가 모자랄까 봐 걱정할 건 없다. 그것들에 맞먹는 새말을 만들어 쓰자. 자주 쓰이는 낱말들을 재료 삼아 새말을 지어 쓰거나 이미 있던 낱말을 써 뜻을 넓혀가면 된다. 한자말이나 영어에서 두 표현 사이의 작은 차이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면 말이 자꾸 어려워진다. 뜻같음의 기준을 더 느슨하게 잡아야 쉬운 말 쓰기의 길이 크게 열린다. 그것이 외국어에 휘둘리지 않는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이자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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