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지옥이 출산포기 만든다" 물리학과 출신 경제학자의 제언

2024-11-19

'비교 지옥과 출산' 논문 쓴 김성은 교수 인터뷰

또 한 번의 수능이 지난 14일 끝났다. 2000년 이후 감소하던 출산율이 2006년 깜짝 반등하면서 올해 고3(2006년생) 숫자가 전년보다 1만4000명 더 많은 데다, 의대 정원 증원 여파로 n수생(반수생)은 4년 전보다 3만명 더 몰려 이번 2025학년도 수능에 응시한 전체 수험생이 1만8000명이나 늘었다. 그만큼 경쟁은 더 세졌다. 치열한 대입 수 싸움 끝에 누군가는 '운' 좋게 본인 실력에 비해 과분한 학교에 합격하겠지만, 더 많은 누군가는 기대 이하의 결과 앞에 '불운'을 탓하며 좌절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수재 즐비 물리학 도망쳐 공직에

수석 불구 1년 만에 요직서 방출

비교지옥선 개인 불행, 국가 손해

최고 강박 벗고 내 발전 방점 둬야

그런데 본인 실력을 뛰어넘은 상향 합격하면 운 좋은 거고 실력에 좀 못 미치는 하향 합격하면 불운한 걸까. 김성은(44)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리에서 반발 뒤진 과분한 자리보다 반걸음 앞선 곳에서 얼마든지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거다. 서울대 물리학과 재학 중 경제학 수업 딱 하나 듣고서 행시 재경직에 합격하고, 이듬해 연수원(50회)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해 신임 사무관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던 재정경제부(현 기재부) 경제정책국에 입성한 약력만 보면, 무슨 헛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의외로 구불구불한 경로를 거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 교수는 고입·대입에 한 차례씩 떨어졌고, 수재만 모인 물리학과에선 공부가 너무 어려워 흥미를 잃었다. 경제정책국에서도 고작 1년 만에 튕겨 나왔다. 미국 유명 대학들로부터는 모조리 퇴짜 맞아 한국에 덜 알려진 브랜다이스 대학(석·박사 통합 과정)에 갔다.

그런 그가 지난 6월 세계 경제학계 최고 학술지인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AER)'에 패밀리 이코노믹스 대가인 미셀 터틸트 만하임대 교수 등과 함께 '한국의 과도한 사교육 경쟁과 타인과의 비교 지옥이 출산율을 낮춘다'는 논문을 실어 주목받았는데, 여기에도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 광개토관 연구실에서 김 교수를 만나 4시간 가까이 들은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한다. 안혜리 논설위원

행운 같은 불운, 서울대 물리학과

고2 때 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인생 첫 변곡점이었다. 가구 수입 사업을 막 시작한 아버지는 환율 급등 직격탄을 맞아 생활비를 벌지 못했고, 어머니가 가사도우미 하며 누나와 내 학비를 마련했다. 고1 때 수학 단과반이 고교 처음이자 마지막 사교육이었다. 다행히 일반고인 성남서고(현 성남고)에서 공부를 꽤 했다. 딱 1장뿐인 학교장 추천 전형(서울대 수시)에 뽑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특목고 입시에 이어 인생 두 번째 낙방. 정시(수능 성적)로 서울대 기초과학계(3학년에 물리학과 선택)에 겨우 입학했다.

운이 좋았다. 지금껏 역대급 불수능으로 회자되는 97학년도 이후 학교 교육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쉬워진 문제 혜택을 봤다. 만약 킬러 문항 난무한 불수능이었다면 야간 자율학습(야자) 후 EBS 보고 혼자 공부한 내가 서울대 합격하기 힘들었을 거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수업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수능 첫 만점자인 한성과학고 출신 오승은이 동기인데, 동기 대부분 과학 기초 탄탄한 과고 출신이거나 일반고 출신이라도 사교육을 잘 받아서인지 이해도가 높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준비 덜 된 채 덜컥 서울대에 합격한 건 결코 행운이 아니었다. 최상위 그룹에 속하지 못한 인생 첫 경험은 단순히 자존심 상하고 자괴감 드는 차원을 넘어 어릴 적 그렇게 좋아하던 과학 자체에 흥미를 잃게 했다.

돌이켜보면 입학 당시 실력 차보다 입학 후 더 벌어진 공부량 부족이 문제였는데, 그땐 몰랐다. 수업 준비 착실히 해서 강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분명 물리에 재미를 느껴 인생이 달라졌을 거다. 하지만 그 시절 난, 수업 준비 없이 강의 듣고선 이해 안 가니 재미 못 느껴 "전공 잘못 택했나" 싶은 방황의 악순환에 올라탄 부적응자였다.

학생들에게 항상 예습해오라고 주문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대학 강의뿐 아니라 초중고 수업도 마찬가지다. 무분별하게 몇 년 치 선행에 목맬 게 아니라 당장 들을 수업만 예습해도 수업이 훨씬 재밌고, 복습도 쉬워 성적이 잘 나온다.

물리 공부에선 좌절했지만 그 덕에 다른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IMF로 겪은 경제적 고통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는지, 전영섭 교수의 '경제학 개론'에 눈이 갔다. 인간 행위를 수학적 툴로 설명하는 게 신기했고, 직접 경제 정책을 다뤄보고 싶다는 열망에 생겼다.

불운 같은 행운, 경제정책국 방출

여전히 경제적 여유가 없어 시간 낭비 없이 공익 기간(26개월) 내에 행시 1, 2차 합격을 목표로 했다. 운 좋게 공익 근무지를 서울대 본부 1층 문서 수발실로 배정받았고, 우편 분류만 빨리 끝내면 공부할 수 있었다.

2002 월드컵 때 공익 근무에 들어가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호기롭게 같은 해 2차까지 노렸지만, 결국 공익 마치고 1년 더 휴학한 뒤에야 합격했다. 복학해 경제학을 복수 전공한 후 중앙공무원연수원을 수석 졸업했다. 주변의 핀잔을 들을 정도로 악착같이 공부한 결과였다.

그렇게 재경부, 그중에서도 신임 사무관에게 가장 인기 있던 경제정책국에 갔다. 보통 3년쯤 지나 옮기는데, 정권 바뀌며 새로 온 차관이 함께 일하던 직원 데려오느라 막내인 내가 1년 만에 아무 잘못 없이 튕겨 나갔다. 그것도 당시 가장 인기 없던 대외경제국으로.

불운인 줄 알았는데 행운이었다. 1년 뒤 국장으로 온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아이디어 많고 능력 탁월한 만큼 부하 직원에게 가혹할 만큼 일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데, 그런 상사의 인정을 받았다. 주 국장이 공인한 능력자로 소문나, 선망하는 국제금융국으로 옮길 수 있었다.

비록 1년 차 방출의 충격은 있었지만 공직에 불만은커녕 더 좋은 관료가 되려고 영어와 경제학 공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명박 정부는 공무원 유학에 인색했다. 자녀 공부 시키고 본인은 골프나 치는 고연차 일부에게 주로 기회가 갔다.

우연히 미 국무부의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알게 됐고, 덜컥 선발됐다. 부랴부랴 토플 등 영어 성적 맞추고 석박사 통합 과정 입학허가를 받아야 했다. 대입 때처럼 또 준비가 부족했다. 이번엔 운이 안 따라 아이비리그 문턱을 못 넘었다. 대신 풀브라이트 추천서를 써준 김인준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추천으로 한국인에겐 낯선 브랜다이스에 갔다.

어차피 공직에 복귀할 건데 하버드든 브랜다이스든 무슨 상관이냐 싶었다. 사실 더 결정적으론 준비 안 된 서울대에서 공부에 흥미를 잃은 경험, 그리고 원치 않았던 대외경제국에서 노력 끝에 한 단계 성장한 경험이 작용했다. "최고냐" 대신 "발전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게 됐고, "발전"에의 확신을 갖고 브랜다이스에 갔다. 만약 또 운 좋게 아이비리그 명문대에 갔다면 고생만 하다 경제학 공부에 흥미를 잃었을지 모를 일이다. 물리학을 그만둔 것처럼.

개천용 나오는 세상 위해

고교 때 경쟁하던 한 친구는 야자 끝나면 분당 무슨 특수반에서 공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위축되진 않았다. 성격이 워낙 그랬고 사교육 없이도 성적이 잘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놓고 혹자는 한국은 여전히 개천용 나오는 사회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특출난 개천용만 가능한 세상이다.

과도한 사교육 경쟁이 벌어지고 그게 망국적 출산율 급락까지 이어지는 이유다. 사교육 자체보다 누군가 달리기 시작하면 전부 따라 달리기에 결승선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비교 지옥 레이스를 펼치는 게 문제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대학이든 직업이든 내 자녀가 상대적 우위를 점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려면 끊임없이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사교육에 더 많이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강박에 다들 사로잡혀 있다. 개인은 불행하고, 국가는 손해다.

지난 6월 무려 6년 걸려 AER에 발표한 논문에 썼듯이, 고소득층이 사교육 지출을 늘리면 저소득층도 덩달아 늘리는데, 이 레이스에 뛰어들 자신이 없으면 아예 아이를 낳지 않는다. 한국에서 유독 저소득층의 무자녀 비율이 높고, 소득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높아지는 건 이런 경제적 요인 탓이다. 이 비교 지옥만 벗어나도 출산율은 지금보다 28% 더 높았을 거다.

이를 단칼에 해결할 묘안은 없지만 브랜다이스에서의 내 경험에 힌트가 있다. 솔직히 나도 더 유명한 학교에 가고 싶었다. 다 떨어졌을 때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시간 들여 재도전해 남 보기 좋은 학교에 가느냐, 성에 덜 차지만 지금 기회를 잡느냐. 후자를 택했다.

브랜다이스에서 난 '프로페서'로 불렸다. 딱 반발 앞섰을 뿐인데 학생뿐 아니라 교수들도 나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했다. 학위 마칠 무렵 독일 최고 만하임 대학이나 캐나다 중앙은행, 스위스 국제결제은행(BIS) 최종 면접까지 간 것도 교수 추천서가 매우 좋았던 덕분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운 좋게 어떤 스펙트럼 최상단에 갔다고 자만할 일도, 그보다 좀 못 미치는 데 갔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는 걸 배웠다. 만약 한국의 많은 수험생과 학부모가 그러하듯 목표를 내 발전이 아닌 남보다 앞선 자리에 뒀다면 쓸데없이 곁눈질하느라 힘 다 빼서 지금 같은 자기 주도적인 성취는 못 했을 거다. 철밥통 공직을 과감히 던져 아무 기반 없는 학계에서 새 도전을 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 넓어진 시야 덕이었다. 무조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비교 대신 스스로의 노력과 발전에 방점을 두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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