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당국이 법인의 가상자산 보유 및 매매를 제한적으로나마 허용한 결정은 단순한 시장 활성화 조치가 아니다. 최근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는 기관 투자자의 가상자산 시장 진입이 확대되고 있으며, 미국, 일본, 유럽 등 주요국들은 가상자산을 제도권 내에서 관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도 규제 완화를 통해 시장 변화에 대응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이 이번 조치를 단행한 배경에는 불법적인 가상자산 거래 및 회계 처리의 투명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다. 현재 많은 국내 기업들이 해외 거래소를 통해 가상자산을 우회적으로 보유하거나, 개인 명의로 가상자산을 관리하는 등 편법 운영을 해왔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거래 방식은 기업 회계 투명성을 훼손하고, 정부 규제 및 과세 정책의 실효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융당국의 이번 결정이 가상자산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법인 시장 참여가 가능해지면 가상자산의 유동성이 높아지고, 기관 투자자들이 가상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가상자산 시장 성장의 필수 조건인지, 그리고 최우선 과제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국내 가상자산 시장이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단순한 투자자 확대가 아니라 명확한 법적 프레임워크와 신뢰할 수 있는 시장 구조다. 현재 한국 가상자산 시장은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고, 정부 규제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증권형 토큰(STO) 및 가상자산 관련 금융상품이 제도권 내에서 어떻게 다뤄질 것인지에 대한 법적 기준이 불분명하며, 금융기관들이 가상자산을 자산으로 편입할 수 있는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또, 가상자산 회계 처리 및 세금 부과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인 가상자산 매매 허용은 오히려 시장 내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기업들이 가상자산을 재무제표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으며, 세금 문제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이처럼 기본적인 제도적 틀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법인 가상자산 매매를 허용하는 것은 단기적인 유동성 증가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시장 신뢰도와 지속 가능성을 저해할 위험이 크다.
가상자산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제도적 투명성 확보 및 시장 신뢰 구축이다. 이를 위해 첫째,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현재 가상자산은 법적으로 '화폐'도 아니고, '증권'도 아니며, '재화'로서도 확실한 규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불명확성은 기업들이 가상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비트코인을 상품(commodity)으로 간주하는 반면, 증권형 토큰은 증권으로 분류해 별도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한국도 이에 대한 법적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가상자산 회계 기준 및 과세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현재 기업이 가상자산을 보유할 경우, 이를 어떤 회계 항목으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또 가상자산 거래로 발생한 이익에 대한 세금 부과 기준도 불명확하다. 기업이 가상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이에 대한 회계 및 세무 기준이 명확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가상자산 거래소 및 프로젝트에 대한 공시 및 평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거래소의 상장 및 상폐 기준이 불투명하고, 프로젝트의 신뢰도를 평가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부족하다. 만약 법인이 가상자산을 투자 대상으로 삼으려면, 신뢰할 수 있는 공시 및 평가 제도가 필수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근본적인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인의 가상자산 매매 허용은 단기적으로는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금융당국과 업계는 단기적인 시장 확대 효과보다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가상자산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선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핀테크&블록체인 책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