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한국, 유럽 외교의 새로운 원칙을 쓸 때다

2025-07-21

나토 정상회의 불참 이후의 과제

2025년 여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 일부 회의장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인도·태평양 파트너 국가(IP4)로 초청된 한국·일본·호주 세 나라 정상이 불참하면서 나토+IP4 협의는 고위 관료급 회동으로 격하됐다. 최근 몇 년간 방산 협력, 사이버 안보, 우크라이나 지원 등을 통해 나토와 실질적 연계를 강화해온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유럽은 한국·일본·호주 정상들의 빈자리를 물리적 불참이 아니라 의지의 공백으로도 받아들였다.

전략적 자율성은 연대의 외연을 넓히면서 가능…수동적 균형은 위험

러시아·북한 동맹은 국제 안보 차원의 문제, 전략적 연대로 대응해야

한반도 평화 구축 골든타임 아직 안 와…전략적 인내, 치밀한 준비 필요

남북 관계 개선 동반자로 유럽 활용하려면 함께 간다는 입장 보여야

한국 외교는 이번 나토 회의를 놓고 시험대에 올랐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눈에 띄는 빈자리는 상징적인 신호가 될 것이었다. 방산 수출 계약, IP4 공조 틀, 인도·태평양 연계 전략 모두가 이번 회의와 직·간접적으로 연동돼 있었다. 반면 국내 정치 일정상의 불가피함과 중동 정세에 대한 우려는 불참의 논거로 부각됐고 일부 인사들은 나토를 ‘전쟁을 키우는 군사기구’로 인식하며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나토는 한국 정상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파트너로서 구축해 온 입지를 고려할 때 유럽 안보 질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묻는 계기가 됐다. 실용외교를 주창하는 한국은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가? 만약 한국이 ‘자율성’을 보여주기 위해 외교적 거리 두기를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높은 비용을 치르고 작동하는 셈이다. 결정적 순간에 자리를 비운 파트너는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선 더 정밀한 메시지와 일관된 행동이 요구된다.

유혹이 아니라 의심에 답할 때

최근 러시아와 중국은 한국을 향해 친근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전략적 자율성을 누려라. 서방의 블록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외교를 추구해라.’ 이는 언뜻 매력적인 제안으로 들린다. 균형과 중립의 언어로 포장된 ‘해방’의 메시지는 스스로 선택지를 넓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울이 북방과의 대화를 추진할 때 동맹과 우방들은 질문한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 지금인가? 한국은 여전히 서방 동맹의 일원인가, 아니면 조용히 거리를 두려는가? 러시아·북한 간의 군사 협력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한국의 입지를 다시 묻게 한다. 외교에서 침묵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그 공백은 때로 의심으로 채워진다. 그 의심에 대해 답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 대응은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북한의 핵 역량 고도화, 러시아와의 무기협력, 미·중 경쟁의 첨예화는 한국을 보다 넓은 전략적 연대 속에서 재위치 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토+IP4 파트너십은 단순한 군사동맹을 넘어 정보 공유, 사이버 안보, 방산 협력, 가치 기반 규범 구축을 포괄하는 전략적 틀이다.

일부는 이를 ‘편 가르기’라고 우려하지만, 전략적 자율성은 연대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다자 협력 속에서 선택지를 늘리고 기술·에너지·방산 분야에서 표준과 규범을 공유하는 것이 바로 자율성을 강화하는 길이다. 무기 통제, 핵 위험 관리, 기후안보, 기술 규범 마련 등 새로운 협력 분야에서 유럽 및 나토와의 접점은 분명 존재하며 한국의 전략적 외교를 확장할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

달라진 유럽에 대한 메시지

2001년 5월 스웨덴 총리 요한 페르손이 평양을 방문했다. 유럽연합(EU) 의장국 수반으로서 북한을 찾은 첫 사례였다. 그 시기 한국은 햇볕정책을 심화시켰고 유럽은 ‘관여와 균형’이라는 외교 노선을 신뢰했다. 북한은 국제 체제 내 협상 가능한 존재로 여겨졌고 유럽은 한반도 평화라는 비전을 위해 지속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24년 뒤 유럽은 전쟁 중이며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적 결속을 통해 유럽의 안보를 직접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유럽 내 주요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북한을 더 이상 지역 분쟁의 당사자가 아닌 글로벌 안보 질서의 교란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다. 유럽은 이 위협의 주체를 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외교 파트너를 필요로 한다. 대북 제재 완화나 관여를 촉구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국제 규범과 집단안보에 대한 원칙적 입장을 공유하는 국가를 찾고 있다.

서울이 남북 관계 증진을 재개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의지의 전달 방식이다. 시점과 어조, 메시지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한국은 누구의 편인가’라는 질문은 유럽의 안보적 직관 속에서 제기되고 있다. 한국이 모호한 태도를 지속하거나 ‘평화 프레임’에 기반을 둔 언어만을 구사한다면 유럽은 이를 전략적 거리 두기와 러시아·북한에 대한 미온적 대응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지금 유럽에 보내는 메시지는 국제사회 내 신뢰 구축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지금은 함께 간다는 메시지가 나가야 한다.

아직 오지 않은 평화의 골든타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정전 국면에 접어들면 유럽과 나토·러시아·미국이 새로운 전후 질서를 설계하는 시점이 분명히 올 것이다. 그 순간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외교의 창조적 공간이 열리는 시점이다. 남북 관계의 본격적인 진전은 그 틀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한반도 평화 구축에 있어서 유럽의 역할도 재정의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골든타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한국 외교의 위험한 함정은 한반도를 독립된 지정학의 무대로 바라보는 인식이다. 한반도 평화 구상의 성패는 국제 질서의 흐름과 떼어낼 수 없다.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하고 있는 현재, 남북 관계는 글로벌 분쟁에 연계된 프레임이 되었다. 남북 간 데탕트는 세계적 긴장 완화의 틀 안에서 국제 질서에 대한 인식과 궤를 같이할 때 효율성을 갖는다. 섣부른 접근은 외교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향후의 지렛대를 약화시킨다. 지금은 전략적 인내와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시간이다. 외교에서 중요한 감각은 속도가 아니라 그것을 조율하는 템포다.

오늘날 한국 외교의 또 다른 함정은 전략적 자율성을 ‘균형’이나 ‘중립’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진정한 자율성이란 동맹과의 관계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적 입지를 확보하는 능력이다. 여기에 유럽의 중요성이 있다. 나토와 EU는 단순한 군사·경제 협력체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규범이라는 정치철학 위에 세워진 공동체다. 한반도에 지속가능한 평화를 원한다면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유럽에 ‘북한과 대화할 여지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한국이 유럽의 외교 파트너로서 신뢰를 얻고 싶다면 경제안보, 전략적 자율성, 규범 기반 협력 등 유럽이 중시하는 연대의 언어를 적극 사용해야 한다. 브뤼셀·파리·베를린 같은 도시들은 유럽 여론의 물줄기를 바꾼다. 한국은 이 거점에서 정치적 상징과 민주적 가치를 바탕으로 메시지를 재구성해야 하고 실용외교가 원칙 위에 작동하는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확한 시점, 올바른 메시지’ 중요

2025년 한국은 새로운 정부를 맞이했고 유럽은 전환의 한가운데 있다. 유럽 통합의 시작이 된 쉬망 선언 75주년, 한·EU 기본협정 15주년을 맞는 올해는 한국이 유럽에 대한 전략을 새로 쓸 기회다. 유럽의 안보 정체성이 변했고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올라왔다.

먼저 국제 규범과 글로벌 안보 이슈에 대한 한국의 입장과 신뢰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이나 나토에 대한 연대 표시는 단순히 서방의 편을 든다는 신호가 아니라 국제 규범을 존중하는 국가로서 책임 있는 입장이다. 둘째, 평화를 위한 상호 간의 ‘건설적 관여’다. 향후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역할을 유럽에 요구하고자 한다면 한국 역시 우크라이나 지원과 유럽 안보에 실질적 기여를 병행해야 한다. 신뢰는 상호적이다. 셋째, 경제와 방산·에너지·기술에서 유럽과의 상호 투자 기반 파트너십을 증진해야 한다. 한국은 유럽의 미래 경제에 기여할 기회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전략적 자율성에 있어서 공감대를 확보해야 한다. 유럽과 한국은 동맹외교와 경제안보에서 유사한 고민을 안고 있다. 진정한 전략적 자율성이란 명백한 위협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면서도 교량국으로서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이 어느 편도 완전히 들지 않겠다는 수동적 중립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신뢰받는 입장을 취하겠다는 명료한 메시지가 필요하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정확한 시점에, 올바른 메시지를 보내는 능력’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