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제기한 ‘정부 4.0’이 오늘에 새롭다

2024-10-22

난세일 것이다. 이 시대를 훗날 역사가들이 평한다면 말이다. 대외적으로는 지정학의 귀환과 문명 충돌의 부활, 그리고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침식 속에 민족주의, 국가주의 만연이다. 이는 대내에 그대로 투영된다. 적과 동지로 진영은 갈라져 그 싸움이 바깥보다 치열하다. 이성은 정지되고 가치는 전도된다. 붕당의 이익에 영합하는 극단의 논리를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거친 만용은 용맹이요, 모든 것을 고려하려고 하는 사유는 겁 많은 기회주의로 치부한다. 전쟁 병리학적이다.

그러니 이 땅에 어른은 숨는다. 지성은 침묵한다. 한편에 고언을 하면, 다른 한편이 공격용 화살로 역이용할 것이니 쉽게 입을 열겠나. 그렇지만 그 우를 범하고자 한다.

근대 서양 정치사상의 시조요, 현실주의 정치이론가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1532)에서 개인의 손에 넣는 권력, 비윤리적 폭력도 용인되는 권력론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내심은 공화국으로 이행하는 데 있었다. 군주는 “강한 힘의 사자와 함정을 알아차리는 여우”의 자세를 겸비해야 하며, 자기 권력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군주의 힘이 너무 세면 그 군주국의 힘은 외려 약해진다면서 군주 자신이 아닌 국가의 힘을 키울 것을 요구했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기꺼이 지배자를 갈아치우려고 한다며 시민 참여의 관계적 정치에 경주할 때, 그 권력은 지속 가능하다고 보았다.

미국의 정치구조와 건국이념을 관통하는 자유주의가 존 로크의 사상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첫째, 인간을 자유와 이성의 주체로 보고, 자연권을 보장한다. 둘째, 정치 공동체 설립과 권력의 기원을 사회계약론에 둔다. 셋째, 위임에 의한 통치를 한다. 그래서 넷째, 저항권은 정당하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존 로크를 공부해서 로크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다. 권위를 일단은 불신하고 개인의 자기보존권을 중시하며, 국가의 권력은 제한해야 한다는 확신이 광범하게 공유되고 체화돼서 그렇다.

권력의 근원을 관계성에서 찾고, 자유의 스펙트럼에서 누구든 존엄성이 존중되고,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저항권까지 포함하게 되면, 윤석열 정부의 권력과 자유는 어떠한가?

대통령의 강고한 국회 법률안 재의요구권과 사면권을 포함한 인사권의 높이만큼, 정책 수용성 약화의 골은 깊다. 자유는 강조할수록 매카시즘적 반공으로 좁아진다. 권력 절제와 대의제의 건강성은 진영논리에 무시되고 폄훼된다. 정책의 외양은 ‘정부 1.0’ 수준이다. 의·정 갈등 등에 대한 정책 구사에서 정책공급자의 입장이 부각된다. 정부가 정한 도구적 합리성에 집착한다. 명령과 통제의 관료제로 돌아가는 듯하다. 정책수요자의 니즈가 적실하게 반영되고 절차와 심의의 민주성이 확립된 ‘정부 2.0’ 혹은 ‘정부 3.0’에 다가와 있는 줄로 알았는데, 퇴행이다.

윤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에 선 지금, 정책환경의 불확실성은 더 커지고 난제들은 더 복잡하다. 그 처방도 더 복합적이어야 한다. 정책 대상자·수요자인 국민을 반대자든 옹호자든 다 정책의 주체적 구성요소로 대해야 한다. 국민 간 및 국민·정부 간에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며, 높은 윤리의식에 터를 잡아 책임지는, ‘정부 4.0’을 지향하는 게 순리다.

207년 전 정약용은 임금에게 바치는 국가개혁서인 <경세유표>에서 “천리(天理)에 헤아려 보아도 합당하고 사람에게 시행해도 화합하는 것을 예라 하며, 위세로 무섭게 하고 안 좋은 일로 겁박하여 백성들이 벌벌 떨며 감히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법이라 한다”면서 예전에 성왕들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인도했다고 했다. 다산이 치열하게 제기한 ‘정부 4.0’의 정향이 오늘에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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