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호민 작가 이야기는 아닙니다...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

2025-11-17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를 녹음한 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원칙에 예외가 인정된 바 없다.”

대법원은 지난해 1월 아동학대를 의심한 학부모가 교사의 말을 몰래 녹음한 파일에 대해 “증거로 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지난 6월에도 비슷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녹음을 인정한 1·2심과 달리 대법원은 “(녹음파일의) 증거능력이 없다”고 한 겁니다.

웹툰작가 주호민씨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주씨의 자녀 사건은 아직 대법원 심리 중이거든요. 앞선 대법원 판결과 주씨 사건을 두고 일부 법조계·장애인단체에서는 ‘장애 아동 등 스스로 녹음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피해를 입증하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요. 오늘 점선면은 왜 이런 비판이 나오게 됐는지, 구조적 문제는 없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법원이 증거능력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는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입니다. 통비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는 녹음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요. 14대 대선을 앞둔 1992년 정부 관계자들이 부산 초원복집에 모여 김영삼 당시 후보 지원을 논의한 ‘초원복집 사건’ 이후 제정됐습니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국민의힘 전신)이 “전화가 불순한 목적에 이용된다”며 통비법 제정을 추진한 만큼 처벌 수위는 높고, 예외적 상황에 대한 고려는 부족했습니다.

선(맥락들): ‘부모 대리 동의’ 미국은 예외 인정

문제는 스스로 학대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녹음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호민씨 사건이 논란이 된 지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주씨의 아들(사건 당시 9세)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데요.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제한적인 관심, 반복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의사소통 방식에 차이가 있는 사회성 발달장애를 말합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9세 자녀를 둔 대구의 A씨(40)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A씨는 아이가 학교에 간 뒤 갑자기 공격적 행동을 해 학대를 당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고, 녹음기를 넣었습니다. A씨는 녹음기를 넣은 이유에 대해 “(아이가) ‘하지 마’, ‘싫어’ 정도는 표현할 수 있지만 자세하게 진술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미디어에 노출될 때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인 강병철 도서출판 꿈꿀자유 대표는 “(드라마 주인공) 우영우 정도로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고 일상에 큰 문제가 없는 자폐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는 극소수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선 ‘부모의 대리 동의’ 법리를 적용해 사각지대를 보완합니다. ‘부모가 자녀와 타인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 자녀에게 최선이라고 믿고, 그럴 만한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근거가 있었다면 녹음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건데요.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칼럼에서 “제3자 녹음을 예외 없이 불법이라 보는 현행 법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며 “학대를 잡아내는 제3자의 녹음을 일정한 요건 아래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면(관점들): 열악한 특수교육 환경에 ‘무책임’ 정치

특수교육 현장의 인력·지원 부족이 학대를 의심하게 되는 환경을 만든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특수교사들은 주씨를 둘러싼 논란의 배경에 전문인력 부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특수교사 수는 부족한데 업무와 담당하는 학생 수는 많아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파악하기 버거워진다는 겁니다.

장애 학생들은 통합교육이 진행되는 ‘일반학급’과 ‘특수학급’을 오가는데요. 일반학급에는 보조인력이 있지만 정작 돌발행동에 대한 대처는 특수교사 몫이 되곤 합니다. 보조인력은 주로 사회복무요원이나 특수교육 실무사인데요. 특수교사들은 “(보조인력은) 전문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그때그때 대처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일반학급에서 수업받는 장애 학생을 특수학급으로 보내는 일도 잦습니다. 발달장애인 문진희씨(21)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일반학급 친구와 갈등이 생기면 일반학급에 못 가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국어·영어·수학 등 주요 과목은 무조건 특수학급에서 들어야 했고요.

학생 수 감소 등 교육 여건의 변화 속 교육 당국이 장애 학생들의 교육권을 후순위로 미룬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현재 학생 수 감소를 이유로 서울 강남구 대청초를 인근 영희초와 통폐합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데요. 통폐합 시 특수학급이 4개에서 3개로 줄어 학생이 과밀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통합교육 대신 특수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면 되지 않냐는 주장도 나오는데요. 전문가들은 통합교육은 국제·법적으로 보장된 학습개념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장애 학생들에게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을 마주하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학습 기회가 되고요.

막상 특수학교를 보내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전국에 특수학교는 196개에 불과한데 추가 설립도 쉽지 않거든요. 장애 학생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주민들을 설득한 끝에 ‘서진학교’가 설립된 것이 불과 5년 전이고요. 서울 동부지역에 최초로 세워지는 특수학교 동진학교는 설립계획을 세운 지 13년 만인 지난달 22일에서야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은 칼럼에서 <발달장애 당사자연구>를 인용하며 “불통이 어느 일방의 문제일 수는 없다. 우리는 자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폐인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해왔다”고 말하는데요. 법의 사각지대 해소와 장애 학생 학습권 보장에 무심했던 정치권에도 같은 지적이 유효해 보입니다. 이제라도 정치가 적극적인 공론화와 특수교육에 대한 체계적 지원을 통해 이 사안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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